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세 전부터 계신 하나님이시고 창조자이심을 밝히면서 다음과 같이 요한복음을 시작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 1:1 – 3)
그가 이런 식으로 요한복음을 시작한 이유는 이 세상을 창조하셨던 그 예수님이 새로운 창조를 위해 이 땅에 오셨음을 말하려 함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첫 마디를 본떠서 “태초에” 로, 창세기의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 여섯 째날”을 연상시키는 “이튿날, 이튿날, 이튿날… 사흘째 되던 날” (요 1:29, 35 43, 2:1) 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첫째 날에 빛을 창조하시고 빛과 어두움을 나누셨던 (창 1:3 – 5)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으로 어두움을 비추셨다고 합니다 (요 1:4 – 5).
또, 하나님께서 여섯째 날에 모든 만물과 사람을 창조하신 후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창 1:24 – 31) 라고 하나님의 기쁨과 만족을 기술했던 것을 연상시키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 창조 역사를 시작하신 후 6일째 되던 날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면서 결혼식에 기쁨을 회복시킨 사건을 기록합니다 (요 2:1 – 11)
이후로 요한복음의 저자는 하나님을 떠난 어둠의 세상을 비추는 빛 곧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드러내면서 “생명”과 “영생” 이라는 말로 요한복음을 도배하다시피 합니다.
옛 창조 때의 생명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 안의 영원한 새 생명, 즉 새로운 창조 세계를 설명하려 함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 새 창조가 어떻게 시작되는지를 다음과 같이 기술합니다.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요 20:21 – 22)
창세기 2:7의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를 연상시킵니다.
“숨을 내쉬며”와 “생기를… 불어넣으시니”는 똑같은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옛 창조는 지나갔고 새 창조 시대가 왔음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바톤을 그대로 이어받는 성령을 제자들의 공동체(교회)에게 주시면서, 이제부터 성령이 예수님의 또 다른 형태의 몸인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새 창조 세계가 열렸음을 알리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을 바꾸러오신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끝내고 새로운 창조 세계를 펼치러 오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새 창조 세계는 옛 창조 세계에 살던 사람들이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 들이고 위로부터 태어나서 살아가는 새로운 차원의 세계임을 예수님은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알려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위로부터 내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요 3:3 – 7)
하나님은 이 세상을 바꾸시는 대신 이 세상의 사람들을 바꿔서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새로운 나라 곧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살게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이 오심으로 시작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통해 지금 이 땅에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할 나라입니다.
이 나라가 어떻게 임하는지에 대해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두 가지로 오해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목적을 이해하지 못한데서 생기는 잘못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가 죽은 다음에 가게 될 저 어딘가에 있는 장소라는 개념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의 정치, 사회, 문화, 종교,… 를 바꿔서 정의로운 국가와 사회를 만들 때 그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진다는 논리입니다.
만약 이 두 논리가 맞다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다음 우리가 침례받을 때 물속에서 나오지 말고 익사하게 해서 그대로 저 세상의 천국으로 데려가시든지, 아니면 예수님께서 스스로 이 세상을 강력하게 통치하는 유엔 사무총장이 되시면 간단하게 해결됩니다.
그런데 이 오해는 지금뿐만 아니라 요한복음이 기록될 당시에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단 두 번 “하나님의 나라”를 언급한 이후 끝까지 단 한번도 이 표현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공관복음엔 도배가 되어 있는 “천국” 또는 “하나님의 나라” 라는 말을 의도적으로 피한 것입니다. 위와 같은 오해 때문일 것입니다.
그 대신, 요한복음의 저자는 “하나님의 나라” 라고 표현해야 할 때 항상 “생명” 또는 “영생” 이라는 말로 대체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의 “육으로 난” 차원과는 전혀 다른 차원임을 말하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공유한 사람들이 사는 새로운 창조 세계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옛 창조 세계는 끝내시고 부활과 승천과 성령강림을 통해 세우신 교회를 통해 드러내신 나라입니다.
이 새로운 차원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해 이 땅에 드러나서 타락한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비출 때 그들이 그 나라의 빛을 보고 교회 안으로 들어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사이의 영원한 생명의 교제가 확장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입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했던 내용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위해 이 땅에 사는 것이지 이 세상을 바꾸려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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