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프랭크 바이올라의 책 [주님은 베다니를 사랑했지]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요한복음 12:1-8을 토대로 마리아의 헌신과 유다의 비난을 대조하여 설명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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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유다의 유일한 설교를 포함하고 있다. 그가 비난한 말 몇 마디를 들어보라.
“어째서 이렇게 허비하는가?”
유다는 주님을 경배하는 마리아의 섬김을 보았을 때 다음과 같이 말하며 비난의 화살을 퍼부었다.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당신이 얻은 행운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었는데!” 하지만 마리아는 믿음으로 한 발을 뗀 것이다. 그녀가 한 낭비하는 사랑의 행동은 수치스럽지 않은 것이었고 또 자신을 돌보지 않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당혹감 및 가혹한 비난의 비웃음과 조롱을 모두 다 감수한 것이었다. 사랑이 그녀를 강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의 행동은 옹졸한 불평에 의해 무례하게 훼방을 받았다. 그녀의 아름다운 헌신의 징표는 그녀 자신의 마음과 유다의 마음, 그리고 유다에게 호응하는 다른 제자들의 마음을 드러냈다. 유다는 그의 불평 뒤에 숨어있는 진짜 의도를 경건한 미사여구로 은폐하려 했다. 그것은 영적인 척하며 따뜻한 마음을 정죄하는 냉담한 마음의 발로였다.
유감스럽게도 이런 태도를 취하는 사람이 유다 한 명으로 그치지 않는다. 핍박과 압제 당하는 사람들을 돕는 것만큼 하나님의 마음에 가까운 것은 드물다. 구약성서를 읽어보라. 거기엔 곤경에 처한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관심이 넘쳐난다. 예수님 자신은 이 땅에서 사시는 내내 가난하셨고, 가난한 사람들은 그분의 경쟁자가 아닌 대리자였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 중요하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가 더욱더 중요함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그 어떤 사역보다도 더 소중한 분이다. 그 사역이 아무리 선하고 고상하다 하더라도 말이다. 우리가 1장에서 살펴보았듯이,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사역”의 신을 섬기는 것이 가능하다. 흥미롭게도, 마리아가 기름부음으로 강조한 주님의 죽음은 궁극적으로 가난의 문제를 영원히 해결할 것이었다.
마리아와 유다를 비교해보면 참으로 인상적이다. 우리는 마리아 안에서 사랑의 빛을 보게 되고, 유다 안에서는 죄의 어두움을 보게 된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장사(burial)하기 위해 기름부음을 했고, 유다는 그분을 배반(betrayal)하기 위한 준비를 했다.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위해 예비하며 그분께 사랑의 표시를 했고, 유다는 그분의 죽음을 도왔다.
나는 예수님께서 그분을 최고의 자리에 모시는 모든 사람을 옹호해주신다는 사실에 위안이 된다. 그분은 나서서 모든 마리아를 변호해주신다. 마리아는 오해와 모욕을 받았지만 결코 자신을 합리화하거나, 방어하거나, 해명하지 않았다. 복음서에서 그녀가 딱 한 번밖에 말한 적이 없지만, 그녀의 삶의 유산은 그녀의 행동에 의해 많은 것을 시사한다.
이런 이유로 마리아는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의 마음 깊은 곳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사랑에서 나온 그녀의 행동은 남자들이 오해할 때 여자가 올바르게 이해한 여러 케이스 중 하나이다. 그리스도의 모든 제자는 마리아로부터 배울 것이 많다.
어째서 이것을 허비하는가?
당신이 그리스도께 드린 것은 당신의 눈에 보이는 그분의 가치의 척도이다. 예수님의 가치는 측량할 수 없다. 그것을 계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분에게 지나칠 정도로 가치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마리아는 이것을 이해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빗발치는 비난을 감지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그녀를 괴롭게 하느냐? 그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주님은 단순히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나는 이 향유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기 때문에, 너희가 원하면 언제든지 그들을 도와줄 수 있다. 내가 육체로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않을 것이다.”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
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신 14:11)
낭비가 무엇인가? 그것은 필요 이상으로 주는 것이다. 낭비는 당신이 개에게 다이아몬드를 주는 것과 같다. 그것은 당신이 가치가 떨어지는 대상에게 뭔가 가치있는 것을 주는 것이다. 뭔가 가치있는 것이 다른 곳에 쓰이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될 때, 우리는 그것을 낭비라고 부른다.
유다와 다른 사람들이 진짜로 한 말은 이것이었다. “주님은 그만한 가치가 없다.” 꼭 기억하라. 당신이 당신에게 있는 가장 가치있는 것을 주 예수 그리스도께 드릴 때마다, 당신의 동료 그리스도인들 중에 그것을 낭비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당신은 어째서 진로를 준비하기 위해 대학에 진학하지 않습니까? 그 대신 어리석게 크리스천 그룹에 모든 관심과 시간을 쏟는 길을 택하며 당신의 젊음을 낭비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어째서 그 사람들과 결별했습니까? 그들이 좋은 직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당신은 그들과 함께 멋진 미래를 계획할 수도 있었는데. 당신은 단지 그들이 당신과 같은 신앙을 갖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 관계를 끊어버린 것입니다.”
“당신은 어째서 집을 팔고 작은 집으로 이사했습니까? 고작 그 사역에 동참하기 위해! 당신은 왜 돈을 낭비합니까?”
“당신은 어째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다른 곳으로 이사했습니까? 단지 교회와 함께하기 위해 당신은 급여가 낮은 직업을 택했습니다. 왜 당신의 삶을 낭비합니까?”
“당신은 어째서 하나님의 일을 위해 주식 배당금을 사용했습니까? 당신은 왜 저축해놓은 돈을 낭비합니까?”
당신이 “왜 이렇게 낭비하는가?”라는 불평을 들을 때는 언제든지, 당신이 유다의 복음을 듣고 있는지 아닌지를 주의 깊게 살펴보라. 만일 당신이 그렇다면, 당신이 관심을 두어야 할 주님의 반응은 이것이다.
“그를 가만 두라….”
“그녀를 가만 두라….”
“그가 나에게 좋은 일을 하였도다.”
“그녀가 나에게 좋은 일을 하였도다.”
어떤 사람들이 낭비라고 여기는 것은 주님의 눈에 좋은 것이다. 이 사실을 기억하라. 당신의 인생을 낭비하는 것에서 자신을 보호하는 유일한 길은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께 낭비하는 것이다.
따라서 “어째서 이렇게 낭비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단순히… “그리스도가 가치 있기 때문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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