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미국 시카고에서 발행하는 기독교 신문인 <크리스찬 저널>의 요청으로 2010년 가을부터 2013년 가을까지 격주로 기고한 글입니다.
예수님짜리 교회 64
온전한 사람인 교회를 지향하며…
지금까지 유기적 교회의 방해요소 여러가지를 살펴보았는데, 참 교회 곧 예수님짜리 교회라면 당연히 이런 방해요소들이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런 방해요소를 다 제거한다고 해서 꼭 신약성경이 말하는 교회가 세워진다는 보장은 없을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생명체이기 때문에 제 아무리 탁월한 방법을 다 동원할지라도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생명의 역사가 흐르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교회는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겉으로는 잘 돌아갈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앞에서 이미 인용했던 아래의 성경구절이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온 ‘예수님짜리 교회’ 곧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생명이 흐르는 교회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에베소서 4:13-16)
우리가 살펴온 유기적 교회의 방해요소들이 바로 여기서 말하는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교리)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제 그런 방해요소들이 발붙이지 못하게 하려면 교회가 “온전한 사람”을 이루기 위해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 모든 것을 집중해야 합니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여기서 온전한 사람이란 물론 교회를 말합니다.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흔히 이것을 그리스도인 개개인을 지칭하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는데 그것은 아주 치명적인 실수입니다.
이 “사람”이 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머리에 붙은 ‘교회라는 생명체’를 말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몸이 몇몇 지체만 왕성히 활동하고 나머지 지체들은 수동적이라면 온전한 사람으로 살 수 없듯이, 교회라는 생명체도 몇몇 교인들만 활약하고 나머지 교인들은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상태로는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지체 모두가 다 역할을 활발히 수행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모든 지체가(“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는 것이 필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아는 것에 전념해야지 다른 어떤 것에 한눈을 팔아서는 안 됩니다.
교회의 모든 지체가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아가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수준을 향해 나아가는(“그에게까지”) 과정이 바로 “사랑안에서 참된 것”을 하는 것입니다.
이미 강조했듯이 이것은 ‘사랑안에서 진리를 말하는 것’을 뜻합니다. 교회의 모임은 예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지체가 이렇게 상호간에 사랑안에서 진리를 말하는 모임이 되어야 합니다.
즉, 개개인이 그리스도를 아는데 힘쓰며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께 예배하는 삶을 살다가(이미 살펴본 요한복음 4:21-24, 그리고 로마서 12:1-2을 참조할 것) 교회의 모임에서는 자신이 경험한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서로 말하여 권면하고 격려하는 것이 신약성경의 유기적인 교회 모임입니다.
이렇게 해서 교회가 그리스도로 풍성해져 그리스도 수준의 온전한 사람을 향해 자라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교회의 토양이 되기 위해 또한 앞에서 살펴본 방해요소들이 제거되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이런 교회는 거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가능합니다. 개혁 정도가 아니라 총체적 혁명이 필요합니다.
제가 연구한 바로는 현대 제도권 교회를 개혁해서 유기적 교회로 전환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마치 빙산을 들이받고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타이타닉호에서 내부수리하는 격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짜리 교회는 예수님 수준의 가치가 있으므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따르는 대가 없이는 세워질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프랭크 바이올라가 그의 책 다시 그려보는 교회의 마지막 부분에서 도전한 말을 여기에 인용함으로 지금까지 써온 글을 마치고자 합니다.
확실히 해 둘 것이 있다.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에 응하려면 대가를 치러야 한다.
당신은 방관자로서의 기독교를 포용해온 사람들에게 오해받는 것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당신은 십자가의 흔적을 지니고 친밀한 공동체 안에서 다른 신자들과 함께 지어져가는 과정 중에 수천 번의 죽음을 경험할 것이다.
당신은 제도권 교회가 제공하는 인위적인 단정함을 영원히 저버리고, 관계적인 교회의 본질적 요소인 혼란스러움을 견뎌내야 할 것이다. 당신은 수동적인 구경꾼으로서의 안락함을 더는 공유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대신, 당신은 역할을 수행하는 몸의 책임감 있고 섬기는 지체가 되는, 자기를 비우는 훈련을 받게 될 것이다.
덧붙이자면, 당신은 누군가 말한 적 있는 “교회가 말해서는 안되는 일곱 단어”(우리는 이전에 그런 식으로 한 적이 한 번도 없다[we never did it that way before])에 거세게 역행해야만 할 것이다.
당신은 현상유지의 횡포에 영향 받기를 거부함으로 오는 기독교 대세의 냉대에 부딪힐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살아있는 증거가 나타나는 것을 훼방하려고 시도하는 대적의 맹렬한 공격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서, 유기적 교회생활에서의 삶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힘들다. 그 경험은 문제들로 가득하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친밀한 공동체에서 살면서 맞닥뜨렸던 많은 위험 요소를 발견하려는 눈으로 신약성서의 편지들을 다시 읽어보라.
오늘날 우리가 그것과 같은 종류의 공동체에서 살 때 똑같은 문제들이 생기게 된다. 우리의 육신이 드러나게 되고, 우리의 영성이 테스트 된다. 그리고 우리는 인간의 타락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금방 알게 된다.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그들을 알기 전까지는 모든 사람이 정상적이다.” 이것은 유기적 교회생활에 뛰어든 사람들에게 꼭 들어맞는 말이다.
문제는 끝도 없다. 제도권 교회에서 주일 아침에 두 시간 동안 “회중석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게 훨씬 쉽다. 거기서는 누구나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그렇지만, 유기적 교회생활은 영광과 피로 얼룩진 상처의 결합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작품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의 형상으로 바꾸시려고 정하신 방법이다. 왜냐하면, “철이 철을 날카롭게”하기 때문이다 (잠 27:17).
하지만 미개척 분야로 향한 사람들에게 따라오는 고통과 관계없이 몸의 생활 속에서 사는 삶의 영광스런 유익은 대가를 훨씬 능가한다.
하나님은 깨어진 사람들 위에 세우신다; 하나님의 집은 싸움에서 얻은 것들로 지어진다 (대상 26:27).
그러므로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히 13:13) 라고 했다. 왜냐하면, 우리가 구세주의 심장 박동을 느낄 수 있는 곳이 거기이기 때문이다.
***유기적 교회에 관해 아는데 참고가 될 수 있는, 제가 유기적 교회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 때 크게 도움을 준 책들 중 우리말로 번역된 책들과 제가 쓴 책들 그리고 제가 추천하고 싶은 책들을 소개합니다. 관심 있는 분은 [여기]를 클릭해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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