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리더십과 권위에 관한 오해 (6)

 

***이 글은 미국 시카고에서 발행하는 기독교 신문인  <크리스찬 저널>의 요청으로  2010년 가을부터  2013년 가을까지 격주로 기고한 글입니다.

 

예수님짜리 교회 57

리더십과 권위에 관한 오해 (6)

<유기적 교회의 방해요소 (38)>

 

모세가 이방인 제사장인 장인 이드로의 말을 듣고 재판에 도입한 피라미드 조직 방식이 하나님께서 인정한 것이 아닌 이 세상의 방식임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 피라미드 조직 안에서는 공식적으로 명령계통이 확실하기 때문에 위로 올라갈수록 권위가 커집니다.

따라서 그런 조직 안에서는 쥐꼬리만한 공식적 권위만 있어도 특권의식을 갖게 되고, 조직의 위로 올라갈수록 더 크게 갖기 쉽습니다.

 

물론 그 자리를 차지한 사람의 인품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죄인인 인간은 권위가 있으면 어떤 식으로든 그 권위를 부리려는 욕망을 제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반상의 구분이 엄격했던 조선시대 때를 생각하면 공식적인 권위가 주는 특권의식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양반인 주인이 인자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한계가 있고, 결국은 자신이 가진 권위에 따라 신분이 낮은 사람들 위에 특권의식을 갖고 대하며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특권의식이라는 것

 

이런 특권의식은 꼭 피라미드 조직 안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어디서나 나타날 수 있습니다.

얼마 전 미국행 비행기의 비즈니스석에 탄 한국의 대기업 임원이 기내식 서비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여승무원을 괴롭히다가 종국엔 잡지책으로 폭행한 경우가 그런 특권의식의 실례입니다.

별것도 아닌 라면 때문에 그랬다는 것인데, 평소에 대기업의 피라미드 조직 안에서 밑에 있는 부하직원들 위에 권위를 부리던 사람이 다른 곳에 가서도 제버릇이 나온 것일 것입니다. 어쩌면 그 사람은 식당에 가서도 종업원들을 함부로 대할지도 모릅니다.

더구나 비행기 뒷쪽의 비좁은 일반석에 앉아서 가는 사람들보다 훨씬 비싼 돈을 주고 산 넓은 비즈니스석에 앉아 있으니 특권의식이 더 생겼겠지요.

 

한국에서 위의 뉴스가 신문과 인터넷을 달구고 있을 때 미국 신문엔 아카데미 주연상을 수상했던 유명 여배우의 특권의식에 관한 기사가 올랐습니다. 그녀의 남편이 음주운전으로 걸려 현행범으로 경찰에서 조사를 받던 중 그녀가 난동을 부렸다는 소식입니다.

그녀가 경찰관에게 자신이 누군지 아냐고 물었을 때 경찰관이 모른다고 하자 곧 자신이 누군지 알게 될 것이라고 소리치며 욕설을 퍼부었다고 합니다.

이건 뭐 공식적인 권위가 아닌데도 특권의식으로 똘똘 뭉쳐있는 경우입니다. 연예인으로서 받고 있는 대중적인 인기가 곧 권위라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의 발로입니다.

 

필자가 어렸을 때 미국의 유명 여가수가 한국방문 공연을 한다고 해서 떠들썩한 적이 있었습니다.

레코드판으로만 듣던 그 세계적 여가수의 노래를 직접 듣겠다고 그 당시 시민회관(지금의 세종문화회관)에 관객이 꽉 들어찼었는데, 그 가수가 거드름을 피고 시종 옷 한 번 갈아입지도 않고 성의없이 노래를 부르고 한국을 떠났다는 뉴스가 아직도 기억납니다.

그때가 1960년대였으니 당대 세계 최강국인 미국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자신이 지지리도 못 사는 아시아의 동쪽 끝에 붙어있는 자그마한 미개국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른다는 것이 한심하다고 생각했었을 것입니다. 돈 때문에 왔을 뿐 전혀 내키지 않았을 것입니다.

미국에서 태어난 것이, 인기 가수가 된 것이 무슨 권위인 줄 착각하게 하고 특권의식을 갖게 한 것입니다.

 

전에 어떤 여자 연예인이 광고 스폰서를 위해 미개지에 봉사활동을 가서 스시를 구해오라는 둥, 자신은 우유로 목욕을 해야한다는 둥 요구를 해대서 모시고(?) 갔던 사람들이 진땀을 뺐다는 기사를 읽어본 적이 있는데, 이런 게 다 같은 유의 특권의식입니다.

 

 

교회 안의 특권의식

 

이 세상에는 이런 특권의식이 당연히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을 떠나 타락한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런 게 존재해선 안 되는 영역입니다. 이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하늘에 속한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지난 근 2천 년 동안 교회는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를 드러내는 유기적인 권위(이 유기적인 권위에 대해서는 나중에 살펴볼 것임)를 대체하는, 신약성경과는 동떨어진, 세상에서 도입한 권위에 의해 지배되고 있습니다.

세상 제도로 가득한 로마 카톨릭은 말할 것도 없지만, 그런 카톨릭 교회를 비판하는 개신교회도 조금도 다를 바 없습니다.

그 안에서 지내오면서 권위주의를 배격하며 목회하려 했던 저도 넘을 수 없었던 한계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어느 순간 죄인인 저도 공식적인 권위가 주는 특권의식에 빠져들어 그것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저에게 영적으로 큰 영향을 끼친 스승이 몇 분 있는데, 그분들 중 스승이라기 보다는 아비와 같은 분이 계십니다.

청년기에 목적없이 방황하던 저를 예수님께로 인도해주셨고 또 신앙생활 초기에 근본주의 신앙에 젖어 있었을 때 성경을 보는 눈을 뜨게 해주셨던 목사님인데, 그분이 베스트셀러 ‘죽으면 죽으리라’ 라는 책의 저자 안이숙 여사의 남편으로 더 많이 알려진 김동명목사님입니다.

평생을 주님께 헌신하시다가 지난 2013년 3월 말 90세를 일기로 별세하셨는데, 제가 그분에게서 정말 많은 사랑을 받았던 두고두고 고마운 분이십니다.

 

김목사님은 우리 모두가 용서받은 탕자임을 알고 또 목자의 심정을 갖고 섬겨야 함을 강조하셨는데, 그래서 권위를 부리는 목사들을 특히 싫어하셨습니다.

부흥집회를 하러 온 강사들이 거드름을 피우고 함부로 말을 하고 특별 대접 받으려 하는 것을 못마땅히 여기시는 모습을 옆에서 여러번 본 적이 있습니다.

또 부목사나 전도사, 또는 교회 직분을 맡은 사람들에게 “자기가 뭐라고 교인들 앞에서 특권의식을 갖느냐”고 질책하곤 하셨는데, 그런 목사님을 옆에서 보고도,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21장에서 베드로에게 “내 양을 치라”고 하셨으니 양은 가끔 ‘때려야’ 한다고 설교했던 전도사도 있었습니다. 어처구니 없게도 “치라”를 ‘때리라’로 읽었던 것입니다.

이건 헬라어 원어 성경은 고사하고 영어 성경만 봐도 알 수 있는데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 그대로라고 해야겠지요. 아무튼 그런 김목사님의 영향을 받은 저는 목회하면서 권위를 부리지 않도록 주의하려고 노력을 꽤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교회가 커지다보니 제도에 따라 교회 운영을 하면서 자신의 입김과 주장을 내세우게 되고(물론 “주님을 위해서” 또는 “교회를 위해서” 라는 명제를 걸고), 그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권위로 교인들을 누르고, 명령하고, 시키고, 부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안된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성경적 리더십이라는 데에 생각이 더 쏠리게 놔두고 성경을 사용해서 변호하며, 하나님께서 목사에게 주신 특권이라 여기며 은근히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지도자로서의 ‘책임의식’이라고 여겼음).

의도적이진 않았지만 그렇게 되어지는 환경을 당연히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나중엔 교회 지도자인 목사에게 순종하는 것이 곧 주님께 순종하는 것이라는 말도 안되는 논리를 가르치기도 했었습니다. ‘영적 권위’ 라는 미명아래.

 

교회가 피라미드 조직으로 돌아가고 지도자가 곧 영적 권위를 가진 하나님의 특별한 종이라는 사고방식이 있으면 의도적이건 아니건 거기엔 당연히 특권의식이 생기게 되고 권력의 남용이 있게 마련입니다.

전에도 언급했듯이, 셀 교회를 할 때 셀 리더들(목자들) 여러 명이 자기 아기들을 교인들에게 맡기고 극장에 영화를 보러 간 일에 제가 열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들이 무슨 특권층인 양 쥐꼬리만한 권세를 부린 것이 제도상 당연했던 것이고 또 목회자인 저도 수도 없이 그런 식의 권위를 부리며 본을 잘못 보였기 때문에 영향을 받아 그랬던 것입니다.

 

그런 제도가 피라미드의 아랫쪽에 있는 사람들이 윗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만들어 내고, 또 지도자들 앞에서 ‘알아서 기게’ 만들기 일수입니다.

마치 이전에 북한의 김정일이 상어알이 맛있겠다고 하면 즉시 밑의 아첨꾼들이 비행기를 타고 멀리 타국에까지 가서  사 가지고 공수해왔듯이, 영적 지도자의 말 한 마디에 알아서 대령하는 사례가 많습니다. 물론 교회에선 관계성과 사랑이라는 명제로 하지만 말입니다.

오해는 금물입니다. 모든 경우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관계성과 사랑에 의해 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지만, 지금 영적 권위라는 것이 이 세상의 조직 안에서처럼 어떤 직책이나 사람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직책이나 사람에게 권위가 있으면 특권의식과 권력남용은 항상 존재하게 되어 있습니다.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속한 교회는 오직 신약성경적인 유기적 권위를 따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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