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머리와 지체의 역할을 빼앗는 사람 (1)

 

***이 글은 미국 시카고에서 발행하는 기독교 신문인 <크리스찬 저널>의 요청으로 2010년 가을부터 2013년 가을까지 격주로 기고한 글입니다.

 

예수님짜리 교회 27

머리와 지체의 역할을 빼앗는 사람 (1)

<유기적 교회의 방해요소 (9)>

 

신약성경이 말하고 있는 교회가 세워지려면 그것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무엇인지를 알고 제거해야 함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그래서 지금 그 요소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여기서 잠깐, 이 신약성경이 말하는 교회, 즉 지금까지 ‘유기적 교회(organic church)’ 라고 표현해온 교회란 어떤 교회인지에 대해 좀더 설명을 하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유기적 교회란 무엇인가?

 

이미 앞에서 유기적 교회가 무엇인지에 대해 간단하게 정의를 내렸지만, 더 정확한 이해가 필요할 것 같아서 아래에 프랭크 바이올라의 유기적 교회 세우기 라는 책에 있는 그의 설명을 인용합니다.

 

“내가 유기적 교회라고 할 때 그것은 영적 생명에 의해 태어난 것을 뜻한다. 즉, 그것은 인간의 제도로 조직되어 종교적 프로그램에 의해 유지되는 교회가 아니라는 말이다.

유기적인 교회 생활은 다음과 같은 특징들을 바탕으로 한 경험이다: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는 공동체 [이 책에서 교회를 “공동체(community)라고 할 때 그것은 특정한 지역이나 집에 모여 집단생활을 하는 무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님 – 역주.], 모든 지체가 기능을 발휘함, 목사 한 명이 주도하는 예배가 아닌 누구나 직접 참여하는 열린 모임, 서열이 없는 지도자층, 모임의 실제적 지도자요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성과 우월성이 드러난다.

 

이와 대조적으로, 죄로 얼룩진 인간인 우리가 비즈니스를 시작하듯 교회를 세우려 한다면 그것은 교회 생활의 유기적인 본질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다. 유기적 교회는 외부 기독교 단체나 교단에 속하지 않은 한 무리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실제로 경험하고, 그 교회의 DNA가 훼방 받지 않고 자유롭게 활동할 때 자연스럽게 생겨나게 된다.

그것은 선풍기 앞에 서있는 것과 바람 부는 날 집밖에 서있는 것의 차이와 같다.

 

요약하자면, 유기적 교회는 대본에 의해 연출되는 드라마가 아니다. 그것은 삶의 태도(lifestyle)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제자들이 함께하는 진정한 영적 여정이다.

유기적 교회와 그렇지 않은 교회의 다른 점은 GM 자동차회사와 채소밭의 차이이다.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느냐, 아니면 하나님에 의해 태어났느냐의 차이이다. 인위적인 조직이냐, 아니면 살아 있는 생명체냐의 차이이다.”

 

인위적인 조직이 아닌, 살아 있는 생명체!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꿈꾸시던 신약성경적인 교회입니다.

 

 

불가능해 보이지만 유기적이어야 하는 교회

 

하나님이 없는 세계, 하나님 보시기에 죽어 있는 이 세상이 돌아가려면 조직(system)과 법이나 규율이 필수입니다. 이것들이 없으면 죄로 가득한 이 세상은 컨트롤이 불가능합니다.

타락한 이 세상이 사람들이 변화되어 잘 돌아가기를 바란다는 것은 신기루를 잡는 것이나 매한가지입니다. 잠깐은 그렇게 보일지 몰라도 하나님 없는 이 세상은 절대로 사람이 개과천선해서 바뀔 수 없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미국이 사람들이 월등해서 잘 돌아가고 선진국이 된 것이 아닙니다. 혹자는 미국이 기독교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변화된 사람들에 의해 선진사회가 되었다고 하지만, 그렇다면 기독교와는 거리가 먼 일본은 어째서 선진국이 되었습니까?

남의 나라를 짓밟고 빼앗는 것을 밥먹다시피 한 일본이 사람이 변화되어 그렇게 되었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미국이나 일본은 시스템과 법이 발달해서 그렇습니다. 사람이 변화되어서가 아니라 그런 잘 발달된 시스템 경영과 법치 속에서 장시간 흘러오다 보니 선진사회가 된 것입니다.

기업도 그렇고, 군대도 그렇고, 심지어 조폭도 조직과 규율이 잘 짜여질 때 탄탄하게 됩니다. 여기에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가 우두머리로 있으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입니다. 기계가 돌아가듯 일사분란하게 움직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도 조직과 법이나 규율에 의해 운영되고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까지 가세하면 우리 눈에 보이기에 잘 돌아가고 열매도 많습니다. 교회가 세상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의 방법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타락한 세상에 세뇌된 눈으로 볼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님께서 새로 창조하신 생명체이므로 조직이나 법이나 지도력에 의해서가 아닌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모든 지체의 자발적이고 유기적인 참여가 없이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룰 수 없습니다.

물론 새 창조의 세계인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지체들이 이 세상에서는 아직 언제든지 죄성이 올라올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주님은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과 성령의 강림을 통해 교회를 자신의 몸이요 신부로 삼으셔서, 즉 자신과 똑같이 여기셔서 창세 전에 계획하신 목적을 이루려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 세상과는 달리 조직이나 법이나 카리스마와는 상관 없이 순수하게 유기적으로만 돌아가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보기엔 그런 식으로 교회를 한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고, 가능하다고 해도 무척 더디겠지만 주님의 교회는 주님의 방식으로만 해야 합니다.

50년이 걸려도, 100년이 걸려도, 아니 천 년이 걸려도 유기적인 것이 교회에 깊숙이 배어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생명이 몸인 교회의 지체들을 통해 흐르고 드러나야 합니다.

 

따라서 교회가 조직이나 법이나 규약이나 카리스마에 의해 돌아간다면 엄밀히 따져서 거기엔 생명이 없다고 봐야 합니다. 조직과 명령계통과 상세한 규율이 잘 짜여 있고 인간의 카리스마에 압도되므로 뭔가 잘 돌아가고 큰 일을 많이 하고 컨트롤도 잘 되는 것 같지만 그것이 기계에 가깝지 생명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GM 자동차회사가 잘 짜여진 조직과 우수한 설비와 유능한 CEO에 의해 경영되어 하루에 수 천대의 자동차를 생산해내지만, 집의 뒷뜰에 있는 자그마한 채소밭에 열린 오이나 토마토나 고추같은 생명체는 만들어낼 수 없듯 말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이 말하는 유기적인 교회를 할 것인가, 아니면 인위적인 조직과 법과 프로그램과 지도력에 의해 돌아가는 교회를 할 것인가를 잘 생각해보고 고민해봐야 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무턱대고 교회를 세우거나 교회를 다니겠다고 하면 전통적으로 흘러내려온, 이 세상의 방식에 물든 제도권 교회의 길을 따를 수 밖에 없습니다. 보고 들은 게 그런 교회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어떤 방식으로 하든지 잘 돌아가기만 하면 되고, 또 크고 열매를 많이 맺으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실용주의가 오늘날 제도권 교회 안에 팽배해 있는데, 그런 눈으로 성경을 보면 다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교회가 기업이라면 그럴 수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요 신부인 생명체인 이상 생명의 원리를 거역하면서 커지고 큰 일을 하고 열매가 많아지는 것은 비정상입니다. 우리는 성취감에 만족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영광 받으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의 원리를 따르는 유기적 교회가 되는데 방해하는 요소들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방해요소 중 하나

 

앞에서 우리는 현대 교회에서 신성시 되는 건물이라는 요소와 주일 성수라는 율법적 요소가 유기적 교회가 되는 것에 왜 방해가 되는지 살펴보았는데, 이제 또 하나의 방해요소를 짚어 볼 차례입니다.

유기적 교회의 가장 큰 방해요소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인데,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역할을 가로채고, 몸 안의 지체들이 발휘해야 할 기능을 빼앗는 존재가 바로 그것입니다.

조직과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중심에 서 있는, 마치 국가의 왕이나 대통령, 회사의 CEO나 군대의 사령관 같은 위치처럼 현대 교회 안에서 조직을 주관하고 통솔하는 직책이 바로 유기적 교회가 되지 못하게 가로막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지금부터 살펴볼 이 방해요소에 대해서는 특히 냉철한 분석이 필요합니다. 현대 교회에 있는 이 직책과 기능이 존재해야 할 근거가 신약성경 어디에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 우선 전제로 해야 할 것은 사람이 아니라 직책(office)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 말은 그 직책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무조건 나쁘다거나 헌신되지 않았다거나 하나님께서 부르시지 않았다거나 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직책에도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유능한 사람과 무능한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같은 직책에 교만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겸손한 사람도 있고, 자기 욕심을 채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희생적인 사람도 있습니다. 시기와 질투로 가득 찬 사람도 있고, 정치적인 사람도 있고, 야심가도 있지만 순수한 열정을 가진 사람도 직책을 맡고 있습니다.

 

현대 교회의 직책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적도 없는데 신학교나 훈련과정을 이수했다 해서 직책을 맡은 사람도 있고, 정말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헌신된 사람이 그 직책에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교묘하게 자기를 추종하게 하여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는 사람, 또는 파워와 돈과 명예에 목마른 사람도 있지만, 하나님과 교인들을 사랑해서 자신을 다 바쳐 희생적으로 사역하는 사람도 그 직책을 맡고 있습니다.

그 직책에는 사역을 잘 해서 열등의식을 커버하려는 야심 가득한 사람도 있고,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주님을 위해 사역하며 자신을 무익한 종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기독교 2 천 년 역사 속에서 다 드러난 것이고, 지금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사람이 맡고 있느냐에 상관 없이 현대 교회의 그 직책이 머리이신 예수님께서 주도하시고 모든 지체가 기능을 발휘하는 유기적 교회에 방해요소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지금부터 이것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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