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미국 시카고에서 발행하는 기독교 신문인 <크리스찬 저널>의 요청으로 2010년 가을부터 2013년 가을까지 격주로 기고한 글입니다.
예수님짜리 교회 29
머리와 지체의 역할을 빼앗는 사람(2)
<유기적 교회의 방해요소 (10)>
머리이신 예수님께서 주도하시고 모든 지체가 기능을 발휘하는 유기적 교회가 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현대 교회의 직책에 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목사’라는 직책이 그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제시하는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유기적 교회와는 달리 인간 지도자 중심의 교회로 전락시키게 하는 직책입니다.
리더십이 열쇠?
이전에 남가주에 있는 유명한 대형교회인 새들백교회의 세미나에 여러 번 참석한 적이 있는데, 그때마다 그 교회의 담임목사 릭 워렌이 강조한 것이 있습니다. 리더십이 교회 부흥의 열쇠라는 것입니다.
그는 지금부터 30여년 전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교회를 개척하기 전에 그 당시에 소위 잘 나가던 미국의 교회들을 연구했다고 합니다. 그는 교회 성장과 부흥에 관한 책이란 책은 전부 탐독했고, 미국 전국을 돌아다니며 부흥 일로에 있는 교회들을 방문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성공한 목사들이 제시하는 성공 비결들이 서로 상반됨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강해설교로 교회를 부흥시켰다는 목사들이 있는 반면, 제목설교가 교회 부흥의 열쇠라는 상반되는 주장을 하는 목사들도 있었습니다.
릭 워렌은 목사들이 저마다 부흥의 열쇠라고 주장하는 것들이 너무나도 판이한 것에 잠깐 헷갈렸지만, 곧 그들 모두에게 있는 공통점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리더십입니다.
리더십이 있는 목사는 어떤 방법을 사용해도 교회를 부흥시킬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지론입니다.
흔히 자신이 설교로 교회를 부흥시켰다든지, 성령운동으로 부흥시켰다든지, 또는 새벽기도로, 주일학교 시스템으로, 제자훈련으로, 구역조직으로, 가정교회로, 셀그룹으로… 등등 목사들이 교회 성장의 열쇠라고 주장하지만 그 방법을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면 결과가 신통치 않는데, 그 이유는 바로 리더십에 있다는 것입니다. 리더십이 성공의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날이 갈수록 교회 밖의 이 세상에서나 교회 안에서나 리더십에 대한 연구가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고, 다양한 지도자의 모델이 제시되곤 합니다.
물론 교회는 성경에서 지도자의 모델을 찾습니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모세, 여호수아, 다윗, 느헤미야 등 탁월했던 지도자들이 오늘날의 교회에도 요구된다며 그 이름들이 자주 오르내립니다.
하지만 이런 구약성경의 탁월한 지도자들은 교회의 지도자가 따라갈 모델이라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을 마음에 깊이 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마태복음 23:10).
이 말씀이 교회에 인간 지도자가 필요 없다는 뜻일까요?
오늘날의 목사라는 직책이 신약성경에 있는가?
프랭크 바이올라는 그의 책 이교에 물든 기독교 163페이지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습니다:
“목사, 그는 개신교 신앙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이다. 목사가 그리스도인들 대부분의 마음 속에 얼마나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는지, 종종 예수 그리스도 자신보다 더 잘 알려지고, 더 높이 칭송받고, 더 철저하게 의지되고 있다!
오늘날의 교회들에서 목사를 제하면 대부분은 공황상태에 빠져버린다. 목사를 제하면 우리가 아는 개신교는 사라져버릴 것이다.
목사는 현대 교회의 독보적인 초점이요, 대들보요, 중심부이다. 그는 개신교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그러나 여기에 커다란 모순이 있다. 성서 전체에 현대 목사의 존재를 지지해주는 구절은 단 한 개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는 초대교회에서는 결코 존재한 적이 없다.”
현대 교회의 독보적인 목사라는 직책이 신약성경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매주 설교를 도맡아 하고, 축도권을 갖고, 조직을 거느리고, 성례를 주도하고, 재정을 주관하고, 최종 결정권을 가진 존재, 마치 국가의 원수나 군대의 사령관이나 기업의 회장같은 비중을 차지하는 존재가 성경엔 없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의 조직에는 그런 총수가 꼭 있어야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다릅니다. 그런 막강한 지도자가 있으면 다음과 같은 성경말씀이 유명무실해집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에베소서 4:15-16)
즉,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몸인 교회의 지체들이 감당해야 할 역할 대부분을 현대 교회의 목사라는 직책이 차지해버립니다. 따라서 교회라는 조직은 잘 돌아가지만 유기체로서의 교회는 세워지기 힘듭니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은 이런 류의 지도자를 제시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 직책의 존재가 신약성경적인 교회에 정면으로 배치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지도자가 필요치 않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신약성경적 교회에는 지도자가 필요없다는 뜻입니까?
오늘날 소위 가정집에서 모이는 교회들 중에 ‘지도자가 있으면 안된다’는 논리를 펴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들은 두세 사람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면 되지 꼭 지도자가 있을 필요가 뭐 있느냐는 식의 주장을 합니다. 과거에 지도자들에게 덴 사람들인데, 이것 또한 성경적 근거가 희박한 주장입니다.
신약성경적 교회는 하나님의 목적인 교회를 바로 알고 경험한 사역자(일꾼)가 도와줘야 세워질 수 있음을 그들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유기적으로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돕는 지도자가 꼭 있어야 합니다.
신약성경의 교회들은 이런 역할을 감당한 사역자들에 의해 바로 세워졌습니다. 베드로, 요한, 바울, 바나바, 디모데, 디도… 같은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역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지도자의 존재가 아니라 그 지도자의 역할입니다. 현대 교회의 목사처럼 교회가 지도자 중심으로 돌아가도록 교회 안에 직책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오늘날의 목사라는 직책에는 성경적 근거가 없습니다.
지도자가 자신의 역할만 충실히 하면 교회에 도움이 되지만 현대 교회의 담임 목사처럼 평생토록 교회 안에 둥지를 틀고 머리와 지체가 감당해야 할 역할을 거의 혼자 도맡아 하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아주 해롭습니다.
지도자가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하면 위의 에베소서 4:15-16가 글자 그대로 실현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 바로 앞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자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에베소서 4:11-14)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자와 교사 같은 사역자들이 성도들로 하여금 사역(“봉사” 라는 번역은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음)을 하게 해서 그 성도들이 교회를 세우는 것임을 이 말씀이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서 성도들의 사역이라고 할 때 그것은 현대 목사들이 독차지하고 있는 역할 대부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봉사”라고 번역이 되어 있어 교인 역할이 무슨 성가대원, 식사당번, 청소당번, 안내위원, 헌금위원, 주차위원, 주일학교 교사 같은 것들인 줄 아는데, 여기서는 전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것에 관해서는 나중에 살펴볼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지도자의 사역은 성도들이 사역하도록 자신은 교회의 기초만 놓고 뒤로 빠지는 것인데, 사도 바울은 이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고린도 전서 3:5-7)
바울은 교회를 밭에서 자라는 식물에 비유해서 사역자의 역할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심고, 물을 주는 것, 즉 사역자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은사를 받은 대로) 교회의 기초작업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바울은 사도의 은사를 가졌고, 아볼로는 교사의 은사를 가졌는데, 고린도교회는 그런 은사가 아주 대단한 것인 줄로 착각하고는 그것에 집중했다가 교회 안에 시기와 분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런 고린도교회에 바울이 위의 말씀으로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심는 이나 물 주는 이, 즉 바울 자신과 아볼로는 아무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역자란 교회의 기초를 놓고 뒤로 빠지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든, 선지자든, 복음 전하는 자든, 목자와 교사든, 기초작업을 하고나서 뒤로 물러났다가, 필요하면 다시 교회를 도와주고 또 뒤로 물러나는… 이렇게 하는 것이 사역자의 표준 역할임을 신약성경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오늘날 목사라는 직책은 씨를 뿌리고, 물도 주고, 거름 주고, 비료 주고, 농약 뿌리고, 가지치기하고, 자라게도 하고, 열매까지 맺는… 대부분을 도맡아 합니다.
집으로 말하면, 기초 놓고, 기둥 세우고, 벽돌 쌓고, 대들보 놓고, 지붕 안장까지 도맡아 하는 셈입니다.
그렇지 않다고요? 섬기는 종들도 많다고요? 현대 교회의 목사라는 직책과 섬기는 종이 과연 공존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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