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교회 건물의 문제 (1)

 

***이 글은 미국 시카고에서 발행하는 기독교 신문인 <크리스찬 저널>의 요청으로 2010년 가을부터 2013년 가을까지 격주로 기고한 글입니다.

 

예수님짜리 교회 21

교회 건물의 문제(1)

<유기적 교회의 방해요소 (3)>

 

신약성경이 말하고 있는 유기적인 교회가 세워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요소들을 계속 살펴 보겠습니다.

앞으로 다룰 내용이 어떤 사람들에겐 혼란스럽고 또 반발을 일으킬 소지가 많기 때문에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필자가 주장하는 신약성경이 말하는 교회가 아니더라도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얼마든지 쓰실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교회의 모습이 하나님의 목적과 동떨어졌어도 하나님은 그런 교회들을 통해 많은 영혼을 구원하시고 함께 하신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길로 가도 하나님께서 사용하셨던 예가 성경에 여러군데 등장하는 것을 보면 이를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쓰임을 받는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잘못된 전통이나 제도나 관습이나 방식을 인정하신다는 뜻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자 합니다.

 

 

교회에 간다? 교회에 다닌다? 성전을 건축한다?

 

“오늘 교회에 갔다 왔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닙니다.”

“성전 건축을 위해 기도합시다.”

……

 

우리가 흔히 듣는 말들인데, 교회 건물을 교회와 동일시하거나 교회 건물을 신성시 하는 치명적인 오류에서 비롯된 표현들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이미 살펴본 신약성경의 교회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기독교 종교로 변질된 교회의 상태를 이런 표현들이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제 잘 알고 있듯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요 몸인 생명체입니다. 이 교회라는 생명체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지체들에 의해 아래의 성경말씀처럼 유기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에베소서 4:15-16)

 

이것이 교회라는 것을 알고 경험하는 사람은, 즉 유기적인 교회생활을 하는 사람은 절대로 “교회에 간다”든지, “교회를 다닌다”든지, “성전 건축을 한다” 같은 표현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표현만 사용하지 않는 게 아니라, 실제로 “교회를 가거나 다니는” 신앙생활 같은 것은 하지 않습니다. 교회로 살아가고, 성전으로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교회생활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인지는 나중에 살펴 보겠습니다.

 

 

교회 건물은 전혀 신성하지 않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곧 그리스도의 몸이요 신부인 교회임을 알았기 때문에 교회 건물 또는 예배당 같은 것에 아무런 의미를 두지 않았습니다.

성도들이 함께 모일 수 있다면 그곳이 가정집이든지, 들이든지, 산이든지, 강변이든지, 그 어느 곳이든지 상관 없었습니다. 복음을 받아 들여 하나님의 목적을 깨닫게 되자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예수님의 의도를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요한복음 4:21-24)

 

사마리아 여자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써 예수님이 참 예배는 장소와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말씀하신 대목입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한 스데반은 서슬이 퍼런 유대 공회원들 앞에서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가 말한 바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사도행전 7:48-50)

 

유대인들이 절대적으로 신성시 하는,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장소라고 믿고 있던 예루살렘 성전을 이렇게 우습게 아는 과격파 스데반이 살아 남을 수는 없었습니다.

오늘날에는 교회 건물의 무용론을 제기하면 유대인들처럼 무식하게 굴지는 않는다 해도 과격파로 몰 가능성이 많습니다. 하지만 복음에 충실하기 위해 이 문제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임의 장소가 필요할 수는 있으나 교회 건물에 대한 신약성경적 근거는 전무함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교회 건물은 조금도 신성하지 않고, 아무런 영적 의미도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오히려 교회 건물은 유기적인 교회생활을 방해하는 요소입니다.

 

 

교회 건물이 등장하게 된 배경

 

초기 교회들은 주로 가정집에서 교회 모임을 가졌습니다. 그러다가 모임의 규모가 좀더 커지면 가정집을 개조했습니다. 모임에 필요한 공간을 확보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 공간을 위해 새로 건물을 크게 지었다는 기록이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 것을 볼 때, 그들은 모임이 더욱 더 커지면 도시의 이곳 저곳 여러 가정집으로 흩어져서 모임을 가졌을 것입니다. 이것을 신약성경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3세기 경 이교의 사상이 교회 안으로 스며 들기 시작하면서 장소를 신성시 하는 미신이 싹 트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죽은 유명한 그리스도인들이나 순교자들의 묘지에서 모임을 갖기 시작하면서 거기에 영적인 의미를 두게 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잘못 알려진 로마의 카타콤(그리스도인들의 공동묘지)이 그 예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핍박을 피해 카타콤에서 살았다는, 설교의 예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근거 없는 전설 말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죽은 성도들 옆에서 예배를 하면 더 신령하다는 미신 때문에 그들은 거기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장소가 신성시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교회 안에 이렇게 미신이 싹이 트면서 미신으로 똘똘 뭉친 콘스탄틴이 등장하자 소위 신성한 교회 건물들이 우후죽순 식으로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황제가 기독교인이 되자 그 밑의 고급 대신, 귀족 및 관리들이 줄줄이 기독교인 되었으므로, 황제와 그들에게 걸맞는 웅장하고 화려한 예배당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기독교의 성지라고 여겨지는 곳곳에 이런 거대한 성당이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그런 교회당에서 예배를 해야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다는 미신이 자리잡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미신에 근거한 교회 건물의 등장이 예배를 바꿔놓았습니다. 예배도 온갖 미신적인 절차들로 꾸며지게 된 것입니다. 로마 황실의 의식과 행렬, 행진 음악, 촛불, 향, 성직자, 제복 등 이전의 유기적인 교회 모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예배가 생겨났습니다.

교회 건물이 영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신성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예배를 낳은 것입니다. 그후로 이렇게 저렇게 변형되었을 뿐(돔과 성상들과 모자이크로 장식된 비잔틴 식, 거대한 아치와 기둥들로 꾸며진 로마네스크 식, 색유리와 뾰족탑을 등장시킨 고딕 식 등), 교회 건물 안의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하나님을 더 잘 만날 수 있다는 미신의 잔재는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자들도 이런 미신을 뿌리 뽑지 못하고 교회 건물을 그대로 방치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당 건축과 내부 장식에 엄청난 돈을 들이는 것입니다. 물론 필요에 의해서 한다고 하지만, 이왕이면 웅장하고 분위기 있게 해서 심리적 효과를 보려 합니다.

그리고 그런 일에 헌금하는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과 동일시하기 위해 옛날 모세의 성막과 솔로몬의 성전 건축을 들먹이며 예로 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습니다.

영적인 것과 상관 없는 심리적 효과가 얼마나 미신적이고 해로운 것인지를 간과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정집에서 모이면 무조건 신약성경적 교회가 되는가?

 

이렇듯 교회 건물이라는 것은 교회의 참 모습을 왜곡시키고, 영적인 것과 상관 없는 미신적인 분위기의 연출로 그리스도인들을 착각하게 만들기 때문에 유기적인 교회를 방해하는 요소임이 분명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 House Church Movement (가정교회 운동)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가정집에서 모여야 신약성경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단세포적인 순진한 발상입니다. 그것은 순서가 뒤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돼지가 우리집 안방에서 산다고 사람으로 업그레이드 되었다고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은 돼지 우리에 들어가서 그곳을 어느 정도 깨끗하게 바꿔놓을 수 있지만, 돼지는 안방을 돼지우리로 전락시킬 뿐입니다.

 

즉, 앞에서 줄곧 강조한 바와 같이, 복음을 제대로 받아 들여 하나님의 창세 전 목적이 이루어지는 통로로서의 교회를 살고 싶은 사람만이 신약성경이 말하는 교회를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참 교회를 세우려 할 때 교회 건물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데 있어 여러모로 방해 요소라는 것을 알고 적절히 대처해야 합니다.

온전한 복음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신약성경에 교회 건물 대신 가정집에서 모였다고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아무리 주장해봐야 기존 교회생활을 가정집으로 옮겨다 놓는 것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위에서 지적한 대로 교회 건물이 왜 복음에 입각한 교회생활의 방해꾼인지 그 이유를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생명체인 교회가 무엇인지, 유기적인 교회생활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이해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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