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생명의 교회인가, 기독교 종교인가?

 

***이 글은 미국 시카고에서 발행하는 기독교 신문인 <크리스찬 저널>의 요청으로 2010년 가을부터 2013년 가을까지 격주로 기고한 글입니다.

 

예수님짜리 교회 9

생명의 교회인가, 기독교 종교인가?

 

살아 있는 뿌리와 연결되어 생명을 공급 받는 산 나무처럼, 교회도 생명이신 하나님과 연결되어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 받아야 함을 앞에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런 교회가 예수님짜리의 가치를 지닌 교회입니다.

이것이 가능케 되려면 교회의 구성원 하나 하나가 죽은 나무인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장식에 열을 올리던 삶을 버리고 산 나무처럼 생명에 올인 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치입니다.

우리가 다 죄인인지라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교회를 세우는데 역부족임을 실감할 수 밖에 없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얻은 사람들은 그래도 좌절하지 않고 살아 있는 동안 그런 교회를 위해 매진할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의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생명과는 거리가 먼 인간이 만든 전통과 제도와 교리와 사상에 물든 기독교 종교가 난무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꼭 중세 암흑기 때나 오늘날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교회가 세워진 지 60년 정도 밖에 지나지 않은 1세기 말에 이미 나타난 현상인데, 신약성경에 이렇게 생명이 빠진 교회를 향해 경고하는 메시지가 종종 등장합니다.

 

 

성경을 보는 눈에 관하여

 

생명에 관해 논하기 전에 꼭 짚고 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경을 보는 눈에 대한 문제입니다.

우리에게 성경을 보는 눈이 가리워져 있으면 성경이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책인 줄로 알고 읽게 되는데, 이런 식으로 성경을 보게 되면 성경을 100 독 아니라 1000 독을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과 의도를 알아내지 못하고 어떤 식으로든지 성경의 문자에 붙들려 헤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식으로 성경을 대하므로 성경을 근거로 해서 이단도 나오고 사이비도 나오고, 정통교회 안에서도 성경을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풀어 맘대로 적용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손에 달고 살았어도 아무 소용 없었던 사람들의 문제점을 지적한 사도 바울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형제들아 아브라함의 후손과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그들 관리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 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나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 하였으니 성경에 그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사도행전 13:26-29)

 

안식일마다 구약의 선지자들의 글을 달달 외운 유대인들이 정작 선지자들의 글이 가리키고 있는 예수님을 거부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어떻게 봐야 되는지에 대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요한복음 5:39-40)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아무리 많이 알아도 그것을 어떻게 읽어야 되는지 알지 못하면 소용없습니다. 아래의 말씀이 이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누가복음 10:25-26)

 

이것입니다. “네가 어떻게 읽느냐.”

성경은 무슨 요술책이 아닙니다. 종교의 경전도 아닙니다. 신앙의 지침서도 아닙니다. 큐티용 자료도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마음과 목적과 의도를 읽어낼 때만 제 구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읽어내기 위해서는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이 그것을 왜 썼는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빠진 교회에게

 

성경을 보는 눈에 관해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저자들이 생명이 빠진 교회의 모습을 보고 주의를 주고 경고한 내용이 많은데도 보는 눈이 가려져 있으므로 저자의 의도는 알아채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요한복음입니다. 1세기 말의 교회 지도자였던 요한복음의 저자는 교회들의 심각한 영적 상태, 즉 생명이 빠진 교회의 모습을 보고 그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 요한복음을 기록했습니다 (요 20:30-31).

교회 밖의 불신자를 위한 전도용으로 쓴 것이 아니고 교회 안에 생명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쓴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그 당시 교회들의 영적 상태를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셨을 때의 유대교의 모습에 투영시켜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정말 신뢰할 만한 것임을 암시하기 위해 자신이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라는 것을 여러 번에 걸쳐 강조했습니다.

그 말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생명(영생)” 입니다.

교회는 위로부터 태어난 하나님의 생명을 얻은 사람들로 구성되어야 하는데 그가 본 그 당시의 교회들은 생명은 빠지고 종교만 가득했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사람들이 아니고 ‘혈통으로, 육정으로, 사람의 뜻으로’ 된 교인들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요 1:13). 이렇게 생명이 빠진 종교의 모습을 드러내려는 요한복음 저자의 의도를 아래의 내용들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생명 없는 종교의 모습

 

요한복음의 저자는 2장 앞부분에서 기쁨이 빠진 혼인잔치의 예를 들어 예수님 당시의 생명 없는 유대교의 모습이 바로 1세기 말의 교회의 영적 상태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 당시의 교회들도 제사를 때우는 것에 급급하여 성전에서 장사를 할 정도로 타락한 유대교나 다를 바 없음을 2장의 후반부에서 암시했습니다. 그리고는 생명이 없는 종교인들의 현주소를 간단히 요약하고 있습니다.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 (요 2:23-25)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을 눈으로 보고 예수님을 믿었지만 정작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생명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자신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믿음이라는 포장으로 예수님과 거래를 하려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믿으려는 대표적인 예로 니고데모를 들고 있습니다 (3장).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거듭나지 아니하면, 즉 하나님의 생명을 얻지 않으면) 신기한 표적을 봐도 하나님 나라와 무관한 사람임을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내용입니다.

 

더 나아가서, 표적을 본 정도가 아니고 제아무리 대단한 체험을 했어도 생명을 얻지 못할 수 있음을 예로 들어 설명했습니다. 5장에 등장하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고침을 받고 벌떡 일어나 걷게 된 베데스다 연못가의 앉은뱅이의 경우 말입니다. 병 고침을 받고 보란 듯이 살려고 했는데 그것 때문에 안식일을 범한 죄를 뒤집어쓰게 될 위기에서 당국에 예수님을 고발했던 싸가지 결핍증에 걸린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1세기 말의 교회 안에 있던 교인들의 ‘생명과는 거리가 먼 모습’ 입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이 생명의 문제가 대두되자 예수님을 떠난 경우도 있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또 이르시되 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요한복음 6:63-66)

 

 

관건은 생명

 

이렇게 제자들 중 대부분이 예수님을 떠났는데 그들 중에 떠나지 않고 남은 소수의 사람들을 대표해서 베드로가 고백한 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생명)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요한복음 6:67-68)

 

역시 생명입니다.  생명에 관심이 있느냐 없느냐가 관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명의 교제의 범위를 확장시키시고자 영원한 목적을 세우시고 그것을 이루려 하시는데, 생명이 없는 종교인들이 이스라엘이라는 간판을 달아보고 교회라는 간판을 달아봤자 그 목적은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생명을 얻은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짜리 교회는 그 구성원이 이 위로부터 난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사람들로 채워져야 세워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 일서의 저자가 다음과 같이 표현했던 것입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요한 일서 1:1-3)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영원부터 누리시던 생명의 교제(사귐)의 범위가 확장된 것이 교회이므로 교회는 생명이 필수입니다.

앞에서 살펴봤던,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장식에 사로잡힌 크리스마스트리와 같은 종교인들과는 무관한 얘기입니다.

이 생명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해나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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