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미국 시카고에서 발행하는 기독교 신문인 <크리스찬 저널>의 요청으로 2010년 가을부터 2013년 가을까지 격주로 기고한 글입니다.
예수님짜리 교회 49
현대 설교의 문제 (5)
<유기적 교회의 방해요소 (30)>
초대교회의 교회 모임이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는” 모임이었음을 신약성경이 확인시켜주고 있지만, 그것이 나중에 교회에 침투한 그리스와 로마 수사학의 영향을 받은 설교에 의해 주류 기독교 역사에서는 그 자취가 사라져버린 상태로 오늘날에 이르렀음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폐해가 심각하다는 것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교인들이 잘못된 기독교 전통(교회는 성직자가 주도해야 한다는)에 의해 세뇌되어 있으므로 이런 이슈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 아예 알려고 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설교가 종교전문가인 성직자의 전유물로 계속 남아 있는 것입니다.
기생하게 만드는 현대 설교
이전에 한국에서 크게 히트를 쳤던 드라마 ‘선덕여왕’에 보면, 덕만공주(나중에 선덕여왕이 됨)와 미실(권력을 탐하여 권모술수를 일삼는 여자) 사이에 긴장감이 도는 대화가 자주 등장하는데, 그 중에 미실이 덕만공주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대목이 흥미롭습니다.
“공주님, 진실과 희망과 소통으로 백성을 다스린다구요? 백성은 진실을 부담스러워 합니다. 희망은 버거워하구요. 소통은 귀찮아 하며, 자유를 주면 망설입니다.
백성은 떼를 쓰는 아기와도 같지요. 그래서 무섭고, 그래서 힘든 것입니다. 밥 달라 떼쓰는 아이에게 쌀과 땔감을 주면서 앞으로 스스로 지어먹을 수 있다? 아하하하하하…”
위의 내용은 권력을 독점하는 독재자들의 눈에 비친 우매한 백성의 모습인 동시에, 오늘날의 교회 안에 있는 교인들 대부분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성직자들이 교인들을 그런 식으로 보기 때문에 계속 비성경적인 ‘설교’를 고집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자생은 하지 못하고 기생하는 교인들만 양산해내고 있을 것입니다. 누가 말하기를, 자생할 줄 아는 사람들만이 공생할 수 있고, 그렇지 못하면 기생할 뿐이라고 했는데 옳은 말인 것 같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신약성경이 말하는 유기적인 교회를 보기 힘든 이유는 교회가 공생을 하는 공동체여야 하는데 기생하는 사람들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즉, 자생하지 못하는 교인들이므로 종교 전문가들의 공연(?)을 관람하고 있습니다.
성가대나 찬양팀처럼 공연에 찬조 출연하는 사람들이 조금 있기는 하지만 단지 주연의 퍼포먼스를 돋보이게 할 뿐입니다. 이 퍼포먼스, 즉 그 공연의 클라이맥스는 물론 설교입니다.
그리고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 설교는 설교자가 자기 마음대로 횡포를 부리며 휘두르는 무기도 될 수 있고, 해석의 차이가 아닌 오류로 가득한 내용의 강론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목적과 의도와 마음은 배제된 채 말입니다.
결국 교인들 대부분은 이런 식의 설교를 그대로 수용하며 길들여지게 됩니다. 그래서 평생토록 자생하지 못하고 기생만 하다가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지체로서의 역할(피차 가르치고 권면하는)을 사장시키고 삶을 마치는 교인들이 절대 다수입니다.
이벤트성 설교
현대 설교는 또한 종종 이벤트를 중심으로 행해지므로 교인들의 신앙에 잠시 영향을 끼치는 듯 하나 이벤트가 끝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흐지부지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탄절이다, 수난 주간이다, 부활절이다, 오순절 성령 강림절이다, 추수감사절이다… 뭐 이런 기독교적 절기의 이벤트성 설교가 주를 이루고, 또 총력 전도 주간, 선교 강조 주간, 여전도회(남전도회) 헌신예배… 같은 특별 행사의 설교가 주기적으로 행해지고, 심지어는 새해를 맞이해서, 삼일절에, 어린이날에, 어머니날에, 광복절에, 개천절에… 이런 세속적인 절기의 이벤트성 설교도 한 몫을 합니다.
하지만 초대교회 때는 존재한 적도 없는, 기독교적 절기를 따라가며 설교하는 것도 큰 문제지만 그건 그렇다 치고, 도대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와 세속적 절기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나님께 초점을 맞춰 경배하고 교제하는 교회의 모임이 애국심이나 고취시키고, 효도를 장려하고, 자녀교육이나 2세 교육을 강조하는 수준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이벤트를 중심으로 열변을 토해봐야 그때 뿐입니다.
이런 이벤트성 설교에 의한 신앙생활은 마치 한국 축구 열기와 흡사합니다. 10년 전 한국에서 열렸던 월드컵 때 세계의 화젯거리가 되었던 한국의 길거리 응원 같은 것 말입니다. 저는 미국에서 오래 살아오면서 미식축구의 재미에 흠뻑 빠져있었으므로 축구(soccer) 경기를 보면 너무 단조로워서 시시하게 느끼곤 했었는데, 그 당시 한국 축구대표팀의 선전을 보면서 저도 마치 TV 화면에 비친 길거리 응원단 속에 있는 듯 착각하며 덩실덩실 춤을 추기까지 했습니다.
한국팀이 월드컵 4강에 진출해서 터키와 3,4위전을 치르던 날, 필자는 네덜란드에서 열린 세미나에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미나가 끝난 다음, 한국팀을 월드컵 4강까지 이끈 히딩크 감독의 고향을 네덜란드까지 와서 가보지 않아서야 되겠는가라는 생각에 차를 빌려 그곳을 향해 달렸습니다.
가슴을 설레며 달리는 동안, 머리 속엔 한국팀에 극적으로 승리를 안겼던 주요 장면들이 겹쳐지면서 나타났습니다. 특히 8강전에서 스페인을 상대로 연장전까지 비긴 후 페널티킥으로 승부를 가릴 때의 스릴넘치는 장면들이 꼬리를 물고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골이 들어갈 때마다 TV에 비쳐졌던 히딩크 감독의 열정적인 제스처들도 머리를 스쳤습니다.
두 시간을 달려 히딩크의 고향 마을에 들어섰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마을 곳곳에 태극기가 잔뜩 붙어 있었습니다. 어디서 구했는지 상점마다 태극기로 도배를 해놓고, 군데군데 “오, 필승 코리아” 라는 한국어 구호가 보였습니다. 마음 속에 묘한 감정이 솟아올라 차를 대놓고 밖에 나와 한참 동안 비를 맞으며 그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마을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는데, 그 마을에서 제일 큰 백화점 건물 전면에 붙어 있는 큰 간판에 영어로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Hiddink for President (히딩크를 대통령으로).” 그리고 만나는 사람마다 필자에게 한국사람이냐며 반가워했습니다. 당연히 가슴이 뿌듯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로 이런 열정과 감격과 환희도 언제 그랬었냐는 식으로 사라져버렸고, 월드컵 4강이라는 것도 ‘실지로 벌어졌던 사실’일 뿐 더는 의미를 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넉 달 후에 다시 네덜란드에 갔을 때 다시 히딩크 감독의 고향에 들렀는데, 이번엔 히딩크 박물관이 생겨 태극기와 한국어로 도배를 해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근처 중국식당은 아예 ‘히딩크가 고향에 올 때마다 앉아서 식사하는 자리’를 들먹이며 히딩크를 마케팅에 써먹고 있었습니다. 식당 창문엔 태극기와 한국어 신문기사가 빽빽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일주일에 수백 명씩 한국 관광객이 찾아오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거기서 다시 한 번 넉 달 전의 감격을 되살렸지만,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얼마 못 가서 다시 월드컵 4강이라는 말을 들어도 그저 덤덤할 뿐이었습니다. 축구 열기는 다 사라지고 다음 월드컵 때 한국이 출전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정도가 전부였습니다.
현대 설교가 이런 식으로 행해지지 않습니까? 일시적이고 간헐적으로 자극은 줄 수 있어도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 파고 들지 못하는 이벤트 공연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하면 너무 가혹한 표현일까요?
그 자극도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닌 온갖 기독교적 사상과 관행, 그리고 세속적인 가치의 강조에 의한 것이니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교회가 세워지는 것은 요원하지 않을까요?
종교 전문가에 기생하게 만들뿐만 아니라 이벤트에 길들여지게 하는 현대 설교가 사라지지 않는 한, 신약성경이 말하는 유기적인 교회는 찾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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