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머리와 지체의 역할을 빼앗는 사람 (5)

 

***이 글은 미국 시카고에서 발행하는 기독교 신문인 <크리스찬 저널>의 요청으로 2010년 가을부터 2013년 가을까지 격주로 기고한 글입니다.

 

예수님짜리 교회 32

머리와 지체의 역할을 빼앗는 사람(5)

<유기적 교회의 방해요소 (13)>

 

머리와 지체의 역할을 빼앗는 존재, 즉 유기적 교회를 방해하는 “성직자”가 근 2천 년 동안이나 교회 안에 군림하게 된 바탕에 관해 간단히 살펴 보았습니다.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성경을 보는 눈이 잘못된 것과 은사에 대한 지식의 결핍이 예나 지금이나 교회 안의 영적 엘리트 계급인 성직자의 군림을 탄탄하게 뒷받침해 주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신구약을 오가며 오늘날의 목사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특별한 종임을 증명하는 것, 또 그가 하나님께서 개 교회에 두신 붙박이 종교전문가의 은사를 소유한 존재라는 잘못된 개념이 그것입니다.

이런 사상이 바뀌지 않는 한 아무리 평신도를 깨운다는 운동을 해봐야 그들을 활용해서 일을 시킬 뿐이지 신약성경이 말하는 유기적 교회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소위 평신도를 깨우기 전에 먼저 목사들이 깨어나야 합니다.

 

 

은사는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

 

그렇다면 신약성경이 말하는 사역자는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모든 은사가 드러나는 원리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선 은사에 관해 제대로 이해해야 사역자의 은사에 대해서도 올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은사라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교회에 일방적으로 주신 것이고 또 각 지체의 분량대로 주신 것이므로(고전 12:18, 엡 4:7), 교회 안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야 정상입니다.

무슨 은사목록을 펴놓고 나에게 어떤 은사가 주어졌는지를 연구하는 소위 ‘은사 발견 테스트’를 해야 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안수를 하거나 연습을 시켜서 은사가 나오도록 하는 인위적인 행위도 금물입니다.

그것은 마치 옛날 공산 동독에서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아기를 수영장 물 속에 집어넣었다 뺐다 하면서 수영 선수, 아니 수영 기계로 만들어 올림픽에 출전시킨 것이나 다름 없을 것입니다.

 

은사는 하나님 맘대로 주신 것이므로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엄마 뱃속에서 태어난 아기가 자라나면서 몸 안의 각 지체가 자연스럽게 기능을 발휘하게 되듯이, 교회라는 그리스도의 몸에 주어진 은사도 때가 되면 자연스럽에 그 역할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몸에 붙어 있는 손을 손이라 부르지 않아도 때가 되면 손의 역할을 충실히 하게 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교회 안의 은사도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드러나서 기능을 발휘하게 되고, 그것이 교회의 다른 지체들에 의해 인정을 받게 됩니다. 물론 교회가 제도적이지 않고 유기적일 때 가능한 얘기입니다.

 

바울이 교회들에 쓴 편지에서 은사에 관해 거론했던 때는 그 교회들이 세워진 지 여러 해가 지나서 그 은사들의 기능이 자연스럽게 나타난 후입니다. 바울은 자연스럽게 나타난 은사들을 성도들에게 확인시켜준 것뿐입니다. 아울러 은사들 때문에 교회가 혼란스럽게 되자 그것들이 제자리를 찾도록 정리해 주었을 뿐입니다.

그가 교회를 개척하러 가서 처음부터 몇 명 모아놓고 인위적으로 은사를 찾아내서 감투를 하나씩 씌워준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유기적 교회 안에서는 은사가 무엇인지 몰라도 됩니다. 차차 알게 되고 저절로 기능을 발휘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이 말하는 사역자의 은사

 

이제 우리의 주제인 사역자라는 은사로 돌아가서 살펴 보겠습니다. 에베소서 4장 11절에 등장하는 은사들, 즉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세워지는 데 필요한 기능들로서 흔히 ‘교회의 지도자’에 해당한다고 여겨지는 은사들입니다.

그런데 성경 어디에도 이 은사들에 대한 정의가 명확하게 내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그 역할을 신약성경을 종합해서 추측할 수밖에 없습니다.

 

먼저 전제로 해야 할 것은 이 은사들 역시 교회 안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서 확인되어야지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사도 바울이 우선적으로 언급하는 “사도와 선지자들” (고전 12:2, 엡 2:20, 엡 3:5, 엡 4:11)에 대해 먼저 알아 보겠습니다. 이 둘만 잘 이해하면 다른 모든 은사들에 대해서도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라고 하면 12사도와 바울이나 바나바 같은 사도들이 있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12사도는 예루살렘 교회와 다른 유대인 교회들이 개척되는 데 역할을 담당했던 사람들이고, 바울과 바나바 같은 사역자는 이방인 교회들을 시작한 사람들입니다.

사도의 뜻이 ‘보내심을 받은 자’(헬라어로 ‘아포스톨로스’[apostolos]) 인 것을 볼 때, 교회를 세우는 데 기초작업을 하라고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일꾼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 세우는 기초작업을 하려면 많은 고생을 감수해야 하는 “교회 일꾼”(골 1:25)으로서 살아야 합니다. ‘일꾼’(헬라어로 ‘디아코노스’[diakonos])은 ‘섬기는 자’, ‘하인’ 또는 ‘봉사자’ 라는 뜻입니다.

교회 일꾼은 글자 그대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육체에 채우는 사람’ 입니다(골 1:24). 교회를 세우는 일이 결코 신선놀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교회 일꾼의 역할이 절대로 시선이 집중되는,  사람들 위에 군림하거나 그들을 거느리는 영광의 자리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1세기의 사도들을 보면 금방 이해가 갑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역자를 미화시키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자신을 포함한 그들을 끄트머리, 천사와 사람들의 구경거리, 어리석은 자들, 약한 자들, 비천한 자들,… 만물의 찌끼 같다고 했습니다(고전 4:9-13).

 

한 마디로 말해서 사역자들은 영적 엘리트 계급이 아닙니다. 특별한 성직자는 더욱 아닙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모든 지체가 다 성직자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받고 교회에 속한 모든 형제자매가 다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성도)이기 때문입니다. 사역자들은 다른 모든 은사처럼 그 고유의 독특한 기능이 있는 것이지 특별 계층이 아닙니다.

 

 

사역자의 역할과 확인

 

교회를 개척하는 사역자들(사도와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라고 부르신 은사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을 처음부터 알았건 나중에 알게 되었건 관계 없이 오랜 기간 동안의 교회생활을 거쳐 나타나게 됩니다.

성경은 사도로 부름을 받았을지라도 한참 후에 가서야 사도의 기능을 수행하게 됨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12 사도는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과 함께 3년 이상 거의 하루 24시간을 살았습니다. 말하자면, 그것이 그들의 교회생활이었고 그런 생활을 거친 후에 사도의 역할이 시작되었습니다.

 

바나바도 예루살렘교회에서 여러 해 동안 교회생활을 한 후 자연스럽게 사도의 은사가 나타나서 나중에 안디옥교회에서 사도의 기능을 발휘하게 되었습니다.

바울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다메섹과 다소를 거쳐 한참 후에 안디옥에 와서 교회생활을 경험한 후 교회를 세우기 위해 파송되었습니다.

이렇게 은사는 교회생활을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나야 합니다. 여기서 교회생활이라고 함은 물론 예수님이 머리이시고 모든 지체가 기능을 발휘하는 유기적인 교회 안에서의 경험을 뜻합니다. 평범한 지체로서의 교회생활을 가리킵니다.

제도적인 교회에서의 경험이나 종교전문가를 양성하기 위한 신학교 교육 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디모데, 디도, 두기고 같은 사역자들도 오랜 기간의 교회생활을 통해 은사가 드러난 것을 교회와 사도 바울에 의해 확인받은 후에 교회를 세우고 돕는 사역자의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디모데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디모데는 사도 바울의 1차 교회 개척 여행 중에 그로부터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인이 되어 유기적 교회생활을 시작한 사람입니다. 바울이 그곳에서 몇 달 동안 교회를 돌본 후 안디옥으로 돌아갔다가 한참 후 2차 여행때 그곳에 들렀는데 디모데가 더베교회뿐만 아니라 인근 루스드라교회와 이고니온교회에서까지 칭찬 받는 형제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를 사역자로 훈련시키기 위해 데리고 떠났습니다.

오랜 유기적 교회생활을 통해 디모데에게 주어진 은사가 드러났던 것입니다. 이에 교회와 사도 바울이 그 은사를 확인했고 그는 사역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디모데의 사역자로서의 훈련은 우선 사도 바울이 교회를 세우고 돕는 것을 교회 개척 현장에서, 바울의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12사도가 예수님과 오랫동안 함께 지내면서 예수님 바로 옆에서 예수님의 사역을 지켜보았던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나중에 에베소에 파송되어 소아시아 지방에서 사도의 역할을 하는 디모데를 디모데 전서를 통해 볼 수 있습니다. 흔히 디모데 전서를 목회서신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잘못된 표현입니다.

디모데는 에베소교회에서 목회하던 목사가 아니었습니다. 에베소를 중심으로 한 반경 100마일 안에 있는 소아시아 지역 수십 개의 교회를 돕는 사역자였지 요즈음의 개 교회 담임목사가 아닙니다. 필요할 때 교회를 돕는 사도적 일꾼의은사입니다.

 

12사도나 사도 바울, 또는 디모데 같은 사역자들의 예를 들었지만, 교회 안의 모든 사역은 필요할 때 잠깐 기능을 발휘하는 은사입니다. 은사를 소유한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면 안 되고 그 은사의 기능이 교회에 유익하면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세우는 사역자의 은사는 교회가 시작될 때 잠깐 기능을 발휘한 후에 가끔 그 교회가 필요할 때 또 다시 도움을 주는 은사입니다. 교회의 기초작업은 그 교회의 환경에 따라 기간이 다를 뿐 기초작업을 마친 후에는 사역자가 그곳을 떠나는 것이 원칙입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엔 몇 개월쯤 머문 곳이 많았고, 고린도에서는 1년 반, 에베소에서는 근 3년간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역자들이 교회에 머무는 기간이 아니라, 교회의 터를 얼마나 탄탄히 닦느냐입니다. 터를 닦은 다음은 머리이신 예수님께 그분의 몸인 교회를 맡겨놓고 떠나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바울처럼 가끔 방문하거나 편지를 쓰거나 디모데, 디도, 두기고, 에바브라, 뵈뵈 같은 사람들을 보내서 돕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이나 다른 사역자들은 붙박이 담임목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와 선지자의 은사 말고 에베소서 4:11의 다른 은사들, 즉 복음 전하는 자, 목자와 교사 같은 은사가 혹 오늘날의 담임목사의 기능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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