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현대 설교의 문제 (4)

 

***이 글은 미국 시카고에서 발행하는 기독교 신문인  <크리스찬 저널>의 요청으로  2010년 가을부터  2013년 가을까지 격주로 기고한 글입니다.

 

예수님짜리 교회 48

현대 설교의 문제 (4)

<유기적 교회의 방해요소 (29)>

 

앞에서 인용한 프랭크 바이올라의 글에서 마지막 문장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가르침이 전통적인 설교의 형식을 취하도록 허용하고 그것을 전문적인 연설가 계층에 국한할 때, 우리는 성서의 울타리 밖으로 한참 나간 것이다.

 

전문적인 설교자에 의한 전통적인 설교가 어째서 성경의 울타리 밖으로 한참 나간 것일까요? 그것은 성경 그 어디에도 한 사람의 설교자가 한 곳에서 같은 대상을 놓고 일년 내내 매주 설교를 한 예도 없거니와, 그리스와 로마의 수사학을 따르는 현대 설교라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어도 보통 먼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앞의 인용 글에서 프랭크 바이올라가 지적한 ‘설교가 교회에 입힌 손해 다섯 가지’ 외에도 현대 강단에서 행해지는 설교의 폐해는 아주 많습니다.

 

 

강단의 횡포

 

성경에서 말씀을 전한다든지 가르친다든지 하는 것은 전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전달해서 그리스도가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설교라는 것이 자칫 횡포로 둔갑하기 쉽다는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강단을 독차지하고 나머지 모든 교인은 강단에서 흘러나오는 설교를 듣기만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설교자가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격입니다.

 

그런데, 만일 그 강단을 독차지한 사람이 설교할 때마다 100 퍼센트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전달하면 괜찮지만, 1 퍼센트라도 그렇지 않다면 그때는 결국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강해설교만 고집한다고 해도 인간인 설교자는 그의 설교 안에 불순물이 들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20년 동안 목사로서 수천 번 설교를 했던 저의 고민이었습니다.

 

누구나 강단에서 하나님 말씀을 선포한다고 하면서도 얼마든지 다음과 같은 횡포를 부릴 수 있습니다: 자신이 설교 잘 하는 사람임을 과시하고, 자기 자랑을 하고, 자신을 미화시키기도 하고, 자신의 주장을 옹호하고, 자기를 방어하고, 합리화하고, 변명하고, 자기에게 방해되는 사람들을 공격하고, 저주하고, 겁을 주고, 위협하고,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사람들에게 아부하고, 자기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에게 히스테리도 부리고, 등등…

설교가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창구이고, 또 열등의식과 교만과 시기와 질투를 표출하는 장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날의 교회 강단에서 설교하는 목사가 이런 사람들이라는 말이 아니라,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의 설교에도 위와 같은 불순물이 섞여 그것이 그 설교를 듣는 교인들에게 전달되고 드러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오류의 방치

 

강단을 독차지 한 사람이 횡포를 부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잘못된 내용을 설교해도 그것을 막을 수 없는 것이 현대 설교입니다. 많은 경우 성경 해석상의 차이는 우리가 인정해야 하지만, 자기 맘대로 성경을 풀어서 설교를 해도 그냥 듣고 앉아 있어야 하는 것이 오늘날 강단 설교가 안고 있는 문제입니다.

 

오래 전에 제가 속해 있던 교단의 세계 대회에서 목격한 광경이 떠오릅니다. 세계 100 여개 나라에서 수천 명의 대표들이 한국의 서울에 모여 일주일 동안 대회를 치렀는데, 마지막 날 피날레가 잠실 체육관에서 열렸습니다.

그날 주 강사가 한국 교단을 대표하는 저명한 목사였는데, 말도 안되는 내용으로 5천 명 앞에서 열변을 토한 그의 어이없는 설교 내용이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생각납니다.

그날 그 목사가 설교한,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인 누가복음 11:5-8본문 내용은 이렇습니다: 밤중에 자고 있는데 친구가 찾아와서, 자기 친구가 여행중에 왔는데 먹일 것이 없으니 떡 세 덩이를 꾸어달라 라고 하면, 벗이기 때문에 떡을 주는 것이 아니라 간청함을 인하여 준다.

 

그런데 그날 그 목사는 이 내용에서 “떡 세 덩이”만 뽑아내어 몇 십분 동안 설교를 했습니다. 내용인 즉슨, “여러분, 여기 떡 세 덩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첫 번째 떡은 믿음이고, 두 번째 떡은 소망이고, 세 번째 떡은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믿음, 소망, 사랑의 떡에 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였습니다.

이런 말도 되지 않는 내용으로 열변을 토하고 있었고, 그 옆에서 다른 목사가 영어로 열심히 통역하고 있었습니다. 민망하기 짝이 없는 광경이었습니다. 세계 각국에서 온 교회 대표들 앞에서.

 

하지만 이런 식의 오류로 가득한 설교 내용이 많은 현대 강단에서 외쳐지고 있지만, 문제는 막을 길이 없다는데 있습니다. 수동적으로 앉아서 침묵하고 있는 청중들에게 일방적으로 안겨지는 설교에 누가 감히 일어나서 이의를 제기하겠습니까? 그러니 오류가 그대로 방치될 수 밖에 없습니다.

 

 

피차 가르치고 권면하는 모임으로

 

강단의 횡포와 오류를 막는 길은 오직 하나, 피차 가르치고 권면하는 모임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앞에서 계속 강조했던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골 3:16) 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피차(서로)” 입니다. 교회가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즉 교회의 주요 모임이 그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 전체가 모이는 주일 예배는 늘 한 사람이 설교를 하면서 “우리 교회는 구역, 또는 소그룹, 또는 목장, 또는 순, 또는 셀로 나눠서 나눔을 많이 갖기 때문에 골로새서 3:16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골로새서 3:16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누구를 막론하고 “피차”가 가능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래의 말씀도 그 “피차”를 말해줍니다.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고전 14:29-31)

 

여기서 “너희는 다” 또 “하나씩 하나씩”이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교회 안에서 “피차” 가르치고 권면하는 것에 예외가 있는 사람은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복음의 말씀을 전해서 교회의 기초를 세우는 사역자의 역할이 처음엔 필수적이지만 초대교회의 교회 모임은 언제나 “피차”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야 강단의 횡포도 없고, 오류도 방치되지 않을 것입니다. “피차”가 활발한 교회 모임에서 자기 주장을 펴거나, 자기를 과시하거나, 방어하거나, 공격하거나, 히스테리를 부리거나… 하면 금방 다른 성도들에 의해 제지를 받을 것입니다.

만일 “피차”가 활발한 교회 모임에서 누가 위에서 들었던 예의 “떡 세덩이” 해석과 같은 어이없는 소리를 한다면, 금방 오류를 지적받게 될 것입니다.

 

1세기의 교회들은 이렇게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는” 교회의 토양이 형성되었었습니다. 이것이 신약성경이 말하는 유기적 교회의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현대 설교는 신약성경에서는 그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는, 유기적 교회를 이루는데 가장 큰 방해요소 중 하나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이 철옹성과 같은 현대 설교를 무너뜨릴 수 있을까요?

건드리기만 해도 큰 일 날 현대 설교가 판치는 교회 예배 의식을 탈피해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는” 교회 모임으로 가겠다는 사람들이 과연 오늘날 교회에 얼마나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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