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리더십과 권위에 관한 오해 (3)

 

***이 글은 미국 시카고에서 발행하는 기독교 신문인  <크리스찬 저널>의 요청으로  2010년 가을부터  2013년 가을까지 격주로 기고한 글입니다.

 

예수님짜리 교회 54

리더십과 권위에 관한 오해(3)

<유기적 교회의 방해요소 (35)>

 

바로 이전 글의 마지막을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마쳤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나 바울 같은 사람들은 예외가 아닙니까?”

신약성경의 교회에는 직분이라는 것이 없다고 했는데(영어 성경에 ‘office’ 라고 번역된 말과 한글 성경에 ‘직분’으로 번역된 말의 헬라어 단어는 ‘직분’ 이라는 뜻이 아님), 베드로나 바울 같은 사도들의 경우는 좀 다르지 않은가 라는 생각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질문한 것입니다.

 

 

1세기의 순회 사역자들

 

신약성경에 나오는 지역 교회의 일꾼들이 ‘직분’이 아니고 ‘기능’이요 ‘역할’이라면, 사도들의 경우는 예외적으로 특별한 직분이 아닐까요? 물론 그들이 지역 교회의 일꾼들과는 달리 특별한 사역을 감당하긴 했지만 이 경우도 직분(office)은 아닙니다.

그들은 지역 교회에 평생 상주하면서 리더십을 발휘하는 사람들이 아니었고, 돌아 다니며 교회를 세우고 돌보는 순회 사역자들이었습니다.

 

이것을 사도(‘보내심을 받은자’)의 역할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셔서 교회를 세우고, 지체들이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시 아래 교회를 바로 이룰 수 있도록 훈련한 다음 다른 곳으로 이동해서 또 교회를 세우고 돌보는 일꾼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이전에 세운 교회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가능한 여러 방법으로(직접 방문해서, 다른 일꾼들을 보내서, 편지로… 등등)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이 흔히 오해하는 지역 교회의 담임목사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아울러, 이렇게 순회 사역을 하는 일꾼들을 신약성경이 “사도” 라고 칭하지만, 이것 역시 하나님께서 맡기신 역할이요 기능이지 직분은 아니었습니다. 그 직분을 차지해서 권위를 행사하는 자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프랭크 바이올라는 이 역할이 공식적인 직분이 아님을 Reimagining Church(다시 그려보는 교회) 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습니다.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바울의 편지들 대부분엔 그가 공식적인 사도가 아니었음을 긍정하는 암시가 내포되어 있다. 물론, 바울은 편지 서두의 인사말에서 종종 그의 특별한 역할을 알게 한다 (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그러나 그는 자신을 한번도 “사도 바울”이라고 하지 않았다.

    이것은 의미 있는 구분이다. 전자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에 기초한 특별한 역할을 묘사한 것이고, 후자는 공식적인 직함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 일꾼들의 이름 앞에 직함이 사용된 몸 안의 사역이나 기능을 신약성서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직함을 좋아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심각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

 

 

권위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는 직분도 없고, 계급의 구분도 없고, 오직 역할의 구분만 존재한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신약성경이 말하는 유기적 교회를 이룰 수 있음을 끊임없이 말해왔는데, 즉 모두가 수평적인 관계여야 함을 강조했는데, 이것은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분명히 확인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 20:25-25)

 

오늘날 교인들이 이 말씀을 달달 외우다시피 하지만 이것이 교회 안에서 실제로 실천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아무리 설교하고, 가르치고, 강조해도 교회가 이 세상과 똑같은 제도로 운영되고 있으므로 현대 제도권 교회에서는 이 예수님의 말씀이 실행될 수 없습니다.

즉, 교회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방인의 집권자들”과 “그 고관들”이 주도하는 피라미드 시스템을 도입해놓고 그런 환경에서 “섬기는 자”요 “종”으로 살라고 강조하니까, 낮은 직분에 있는 교인들이 높은 직분에 있는 지도자들을 복종하고 섬기는 형국이 되고 맙니다.

따라서 높은 직분을 차지한 지도자 층이 낮은 직분이나 직분이 없는 교인들 위에 “권세를 부리는” 것과 그들을 “임의로 주관” 하는 것이 아주 용이합니다. 예수님께서 경계하신 이 세상의 시스템으로 교회를 조직해놓고 거기에 사람들을 채우기 때문입니다.

 

위의 예수님 말씀은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그 아들 둘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특별히 부탁한 치맛바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아들이 둘 다, 메시아라고 여겼던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한동안 따라다닌 것을 잘 아는 그녀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자 드디어 다윗왕처럼 시온의 보좌에 앉아 하나님나라를 다스리실 날이 임박했다고 믿고 기회를 놓치면 안 되겠다 싶어 예수님께 다음과 같이 청탁했습니다: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마 20:21).

예나 지금이나 자식의 성공에 목마른, 특히 자식이 높은 지위를 차지해서 아랫 사람들을 다스리고 호령하기를 바라는 일반적인 어머니들의 욕심이 그대로 표출된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것을 자기 자식이 해줬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나라에서도 자식이 피라미드 조직의 윗부분에 있는 자리를 차지했으면 하고 학수고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압권은 이것입니다: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마 20:24). 쉽게 표현하자면, “앗, 분하닷. 우리가 머뭇거리는 틈을 타서 저 녀석들이 선수를 쳤구나! 이 중요한 순간에 우리 엄마는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뭐 이런 상황이겠지요.

열 두 제자가 다 거기서 거기였다는 뜻입니다. 그들 모두 한 자리 하겠다는 야망으로 가득 찬, 권세에 목마른 속물들이었다는 말입니다. 적어도 십자가를 경험하기 전까지는 야고보나 요한이나 베드로나 그 누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수준에서 노는 사람들이 목사도 되고, 장로도 되고, 집사도 되고, 선교사도 되고, 교단 간부도 되고, 신학 교수도 되고, 교회도 개척하고, 제자훈련도 하고… 온갖 지도자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니까 위의 예수님 말씀이 실현되지 않는 것입니다.

 

 

피라미드 조직의 문제

 

최근에 아들에게 담임목사 자리를 물려준 것이 논란이 되자, 세습한 것이 아니라 아들에게 제사장인 목사직을 계승한 것이라고 변명하는 어떤 대형 교회 목사의 인터뷰 기사를 보고 쓴 웃음을 지은 적이 있습니다.

세습이냐 아니냐를 따지기 전에 아직도 목사를 구약시대의 제사장으로 알고 있는 그의 사고방식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목사는 하나님께서 ‘따로 특별히 기름 부으신 종’이라고 믿는, 직분으로 생각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을 제사장이라고 믿는 오류 때문에 오늘날 유기적 교회의 모습은 찾아 보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신자가 제사장이라고 아무리 가르쳐도 이런 오류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제도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제도가 그대로 교회 안에 유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명칭만 다르지 이 세상의 직책처럼 상명하복, 상의하달 식 계급이 엄연히 교회 안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피라미드 조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적 리더십과 권위를 오해하게 만드는 주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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