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미국 시카고에서 발행하는 기독교 신문인 <크리스찬 저널>의 요청으로 2010년 가을부터 2013년 가을까지 격주로 기고한 글입니다.
예수님짜리 교회 4
창세 전에 무슨 일이?
우리가 앞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사도 바울은 복음(비밀, 지혜)이 창세 전부터(영세 전, 만세 전, 영원부터,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이라고 했습니다 (롬 16:25-27, 고전 2:6-7, 엡 3:9-11, 골 1:25-27).
이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이후 성령에 의해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계시되어 교회로 말미암아 드러나기 전까지는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천사들과 마귀와 악의 영들도 알지 못했음을 앞에서 확인했습니다.
그 정도로 복음은 창세 전부터 철저하게 감추어졌던 하나님의 경륜인데, 이것을 구체적으로 알기 위해서는 성경에서 암시하고 있는 창세 전으로 가봐야 합니다.
도대체 창세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창세 전” 이라는 말의 의미
사실, “창세 전(영세 전, 만세 전)” 이라는 표현은 이 세상에 살면서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고 있는 우리의 관점에서 본 표현입니다. 물질세계에 갇혀 있는 우리로서는 그렇게 밖에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이 계신 곳도 우리처럼 시간과 공간적 개념으로 이해하려 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저 멀리 어떤 특정한 장소에서 시간을 보내고 계시는 존재가 아니고, 시공을 초월하는 “영원(eternity)” 이라는 영적인 차원에 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영원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이온(aion)’ 이라고 하는데, ‘끝이 없는 시간’ 또는 ‘지속되는 시간’ 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이 신약성경의 여러 곳에 등장하는데, “내세” (눅 18:30), “세세” (롬 9:5), “만세” (골 1:26) 등으로도 번역되어 있습니다.
모두 다 시간도 없고 공간도 없는 하나님께서 계시는 차원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복음이 창세 전부터 감추어졌다는 것은 복음이 이 세상이 아닌 시공을 초월하는 영원에서 시작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복음이 시작된 것처럼 생각합니다.
물론 마가복음의 저자처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 자체를 복음으로 해석할 수는 있지만, 엄밀하게 따져서 복음은 예수님의 공생애 중에는 표면에 드러나지 않았고, 사도 바울이 표현한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후에 성령이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계시하셔서 드러난 것입니다.
바로 이 복음이 창세 전 곧 영원에서 계획되고 시작된 비밀의 경륜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
이 영원에서 계획된 비밀의 경륜을 탄생시킨 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인데, 이것을 에베소서 3장 11절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을 헬라어 성경 원문 그대로 번역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곧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영원한 목적대로 하신 것이라.”
바로 이것입니다. 영원의 차원에 계시는 하나님께서 갖고 계신 유일한 목적.
이 목적이 비밀의 경륜을 낳았고, 결국 때가 차서 우리 앞에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이 목적은 항상 하나님 안에서 불타고 있는 단 하나의 열정입니다. 하나님의 일편단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목적에 접속되면 누구나 일편단심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살게 되는데, 사도 바울이 바로 그렇게 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목적을 위해 계획된 비밀의 경륜 때문에 그는 에베소서를 쓰면서 감격하고 흥분했던 것입니다.
고로, 이 목적과 비밀의 경륜에 대해 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지, 왜 구원을 받아야 하는지, 왜 교회생활을 해야 하는지, 왜 우리가 세상에 존재해야 하는지를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앞에서 언급한 바 이전의 저처럼 반쪽 짜리 복음이 전부인 줄 알거나 아니면 반의 반쪽 짜리 복음에 속아넘어가기 쉽습니다. 속아도 그냥 속는 것이 아니고 아주 열정을 다 바치고 헌신하면서 인생을 낭비하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이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알아야 온전한 신앙생활이 가능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노골적인 기복신앙과 은근한 기복신앙
말이 나온 김에,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논하기 전에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앞에서 계속 언급했던 반의 반쪽 짜리 복음과 반쪽 짜리 복음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는 일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전반에 걸쳐 만연한 불완전한 복음이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알지 못하는 데서 기인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반의 반쪽 짜리 복음을 좇는 것을 노골적인 기복신앙, 그리고 반쪽 짜리 복음을 좇는 것을 은근한 기복신앙이라 칭하고 싶습니다.
보통 신상의 행복, 형통, 건강, 물질 축복 등을 추구하며 하나님께 빌고 또 빌어서 자신의 뜻한 바를 얻어내려는 것을 가리켜 기복신앙이라고 합니다.
미국에서는 ‘prosperity gospel’ 이라고 부른데, 하나님이라는 대상만 다를 뿐이지 이방 잡신들을 섬기는 사람들이 구하는 축복에 소원을 두고 열심을 내는 기독교인 신앙의 대명사입니다.
언뜻 보기에 그들이 매우 독실한 것 같지만 그 중심엔 자신의 소원성취라는 신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 신을 하나님이라고, 구세주라고,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것뿐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는 성경의 신, 구약을 넘나들며 자기에게 유리한 구절들을 닥치는 대로 떼어다가 이용하는 것입니다 (proof texting). 물론 큐티도 이런 식으로 하지요.
그리고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믿고 기도하면 다 이루어진다고 우깁니다. 아예 노골적으로 속물근성으로 드러내는 솔직함이 돋보입니다.
이에 반해, 그런 신앙을 기복신앙이라고 손가락질 하며 건전한 복음주의 노선을 걷고 있다고 자부하는 신앙이 있습니다. 이전에 제가 걸어갔던 길입니다.
제자훈련과 셀교회 사역 같은 것을 통해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자는 신앙입니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런 하자가 없는 모범적인 신앙입니다.
또는 ‘고지론’이니, ‘청부론’이니 하며 기독청년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가는 신앙 같은 것이 그것의 예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알고 보면 기복신앙이나 이런 것이나 사촌간입니다.
왜냐하면, 정도 차이만 있을 뿐 나의 구원의 확신, 나의 축복, 나의 병 고침, 나의 인격의 변화, 나의 성화, 나의 영성, 나의 경건, 나의 평안, 나의 섬김, 나의 은사, 나의 사역, 나의 전도사업, 나의 선교사역, 나의 교회, 나의 목회…… 초점이 자기 자신에게 맞춰져 있는 신앙입니다.
노골적인 기복신앙보다 한 수 위인 은근한 기복신앙입니다.
하나님의 필요보다 자신의 필요를 채우려는 것에 있어 이 둘은 같은 배를 타고 있습니다.
하나님도 뭔가를 필요로 하신다?
하나님의 필요라니? 전능하신 하나님께 뭔가 부족한 게 있다는 말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필요는 뭐가 부족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 넘쳐나서 생긴 것입니다.
창세 전 곧 영원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사이의 풍성한 생명의 교제가 흘러 넘쳐서 필요를 만들어냈습니다.
자신의 생명의 영역을 넓히시려는 목적이 하나님의 본성 안에 활활 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계획하신 일이 바로 비밀의 경륜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필요이고 우리에게 임한 복음입니다.
따라서 복음을 제대로 깨달으면 하나님을 통해 자신의 필요를 채우려는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의 필요를 채워드리려는 데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창세 전에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사이의 교제가 필요를 만들어냈다고 했는데, 이건 순전히 억측이 아닌가 라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가시기 전날 밤에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신 내용을 기록한 요한복음 17장을 통해 우리는 창세 전에 있었던 하나님의 필요를 엿볼 수 있습니다.
아래에 인용한 구절들이 그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요 17:4-5)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요 17:21)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 17:22)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요 17:23)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요 17:24)
창세 전에 하나님께 있었던 필요 곧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있는 영광스런 교제의 영역이 넓어져서 풍성해지는 것, 바로 이것이 하나님 속에 활활 타고 있던 열정이요 목적이요 필요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펼쳐지는 지를 성경의 이야기를 통해 확인하면서 저는 흥분을 감출 길이 없었습니다.
이제 그 이야기로 갈 때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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