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교회 건물의 문제 (2)

 

***이 글은 미국 시카고에서 발행하는 기독교 신문인 <크리스찬 저널>의 요청으로 2010년 가을부터 2013년 가을까지 격주로 기고한 글입니다.

 

예수님짜리 교회 22

교회 건물의 문제(2)

<유기적 교회의 방해요소 (4)>

 

신약성경이 말하고 있는 유기적인 교회가 세워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요소들 중 교회 건물의 문제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인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함께 모이기 위한 모임 장소가 당연히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모임 장소에 구약의 성전 개념과 이교 신전의 신비감을 집어 넣어 신성시 하고, 그 모임 장소를 교회와 동일시 하는 잘못된 전통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요 신부인 교회의 진면목이 가려진 것에 있습니다.

 

 

그게 뭐가 나쁘단 말인가?

 

교회 건물에 가서 예배를 해야 뭔가 하나님을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 자체가 벌써 예수님의 복음과는 거리가 먼 미신적 기독교 종교의 잔재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그것도 거룩한 안식일인 주일에 십자가가 달린 예배당에 가서 예배를 해야 하나님께서 받아주실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소위 ‘주일 성수’의 개념이 ‘신성한 교회 건물’ 개념과 맞물려 있습니다.

이게 나쁜 것입니다. 우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불교의 절이나 이슬람교의 사원처럼 교회 건물 안에 가둬버리는 기독교 종교로 전락시킨 것이 나쁜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느 시간, 어떤 장소로 국한해서 미신으로 둔갑시킨 것이 나쁘다는 것입니다.

 

건물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은 이미 앞에서 요한복음 4장의 예수님 말씀과 사도행전 7장의 스데반의 변론을 통해 확인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건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인들은 교회 건물이라는 것을 지은 적이 없습니다. 물론 대부분 가난했던 그들이 건물 지을 돈이 있을리 만무했겠지만, 돈의 문제가 아니라 참 복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목적을 알고 나서 모임 장소에 아무런 의미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의 성막과 성전은 이제 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실현되었고(요 1:14, 여기서 “거하시매”가 바로 ‘성막이 되셨다’ 라는 뜻임),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에 교회 공동체를 통해 영원한 실체를 드러냈습니다.

에베소서 2:20-22이 이 진리를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의 공동체가 바로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3세기 이후부터 복음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기독교인들이 구약의 성전 개념을 빌려와서 모임 장소를 신성시 하는 미신을 교회 안에 받아들이면서 오늘날까지 교회 건물 짓기에 열을 올리게 된 것입니다.

이런 교회 건물의 문제를 19세기의 교회 역사가인 Philip Schaff 라는 사람이 다음과 같이 한탄한 것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사도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특별한 예배 장소를 건축했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세상의 구주가 마굿간에서 태어나셨고 산에서 승천하셨듯이, 그분의 사도들과 그들의 후예들은 3세기까지 거리에서, 저자에서, 산에서, 배 안에서, 무덤에서, 처마밑에서, 광야에서, 그리고 회심한 사람들의 집에서 말씀을 전했다. 그러나 그 이후로 세계 방방곡곡에서 십자가에 달린 구속자를 기린다고 얼마나 많은 값비싼 수천 수만의 교회당과 채플들이 지어졌고 또 계속 지어지고 있는가! 그 구속자가 이 땅에서 굴욕을 당하실 때는 머리 둘 곳조차 없었는데 말이다.”

 

 

건물에 들어가는 막대한 경비

 

이렇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교회 건물에 의미를 부여하는 잘못 때문에 의당 그래야 하는 줄 알고 따라가는 교인들이 교회 건물에 들어가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시달리게 됩니다.

“헌금”이라는 명목이 붙어 있으므로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불충하게 된다는 위압감에서 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는 교회 건물을 위해 헌금하는 것이 무슨 하늘나라에 쌓아놓는 것인 줄 알고 하기도 합니다. 상급을 위해서 하는 것 말입니다.

그래서 건축 헌금을 위해 작정을 한 다음 장기간 꼬박꼬박 바쳐야 하고, 아니면 빚을 내거나 자기 집을 잡혀서 헌금을 하고는 그것을 갚아나가느라 허리가 휘기도 합니다. 그리고 부담이 도가 넘으면 교회를 떠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교회 건물을 짓거나 구입하기 위해 이렇게 교인들이 힘들게 헌금을 해서 교회 건물 자체에 들어가는 돈도 상상을 초월하지만, 그 이후에 필요한 경비도 만만치 않습니다.

오늘날 미국에서만 교회들이 소유하고 있는 부동산이 2300억 달러가 넘는다고 하는데, 교회들이 일 년 동안 헌금으로로 거둬들이는 500억에서 600억 달러의 약 20 퍼센트 가 교회 건물 때문에 진 빚, 유지비, 관리비로 나가 버린다고 합니다.

교회 건물을 더 신성시 하는 한국 교회들은 아마 더 하면 더 했지 덜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교회들이 이렇게 막대한 돈이 들어가는 교회 건물을 적어도 지난 1700년 동안 끊임 없이 지어왔다는 것은 그만큼 교인들의 희생이 컸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아무도 말릴 수 없는 전통으로 굳어져버렸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시작할 때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지, 교회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므로 건물부터 물색하게 되고, 여기에 들어가는 돈을 당연시 하게 됩니다. 무슨 비즈니스 시작할 때 가게 자리 알아보듯 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앞에서 살펴봤듯이 교회가 아니고 영적인 가게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인 수가 늘어나면 더 큰 건물로, 더 늘어나면 더더 큰 건물로 가야 하니까 결국 건물에 들어가는 돈이 상상을 초월하게 되고 교인들의 부담은 더 커지게 마련입니다.

저도 이전에 큰 교회 건물을 구입해서 성도들의 희생을 요구해봤기 때문에 이것의 문제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구체적으로 깨달은 지금 뒤돌아보니 참 후회되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 전통에 도전할 수 있는가?

 

이렇게 굳어진 교회 건물의 전통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다음은 프랭크 바이올라가 이교에 물든 기독교(대장간) 라는 책에서 교회 건물의 문제에 대해 결론적으로 요약한 것입니다.

 

“우리가 오직 예배만을 위해 건물을 세우기 시작했을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무엇을 잃었는지에 대해 우리들 대부분은 철저하게 무지하다. 크리스천 신앙이 믿는 사람들의 가정집에서 탄생했는데도,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매 일요일마다 이교 철학에 기초를 둔 이교에서 유래한 건물 안에 앉아 있다.

 

교회 건물에는 성경적 근거가 조금도 없다. 하지만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벽돌과 돌을 정결케 하기 위해 매년 상당한 돈을 바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수동적으로 길들여지게 하고 다른 신자들과의 자연스럽고 친밀한 관계를 막아버리는 부자연스런 환경을 지지해왔다.

 

우리는 우리 과거의 희생자가 되었다. 우리는 건물을 소유하는데 있어 명예로운 지위를 안겨준 콘스탄틴의 자식들이 되었고, 계급구조에 따라 세워진 바실리카를 우리에게 강제로 물려준 로마인들과 그리스인들에 의해 눈이 멀었고, 우리에게 플라톤식 건축양식을 떠맡긴 고트족에 의해 사로잡혔고, 우리에게 신성한 뾰족탑을 안겨준 이집트인들과 바벨론 사람들에 의해 납치되었다.

그리고 우리에게 도리스식 기둥을 강요한 아테네 사람들에 의해 사기당하고 말았다.

 

어쨌든 우리는 ‘하나님의 집’ 안에 있을 때 더 거룩한 느낌이 들도록 배워왔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한 건물에 병적으로 의지하는 것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사실은 교회 건물이 교회가 무엇이며 무엇을 하는가에 대해 우리를 아주 잘못 가르쳐 왔다.

건물은 모든 신자가 제사장임을 부정하는 건축양식이다. 그것은 세상 문화에 역행하는 공동체인 에클레시아의 본질 자체와 모순된다.

교회 건물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머리 되심 아래에서 살아 숨쉬며 기능을 수행하는 그리스도의 몸인 것을 우리가 이해하고 경험하는 것을 방해한다.

 

교회 건물을 지지하는 것이 성경적이거나 영적이지 않다는 사실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깨어나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다. 그리고 우리는 인간이 만든 건물을 ‘교회’ 라고 부름으로써 신약성경의 메시지를 심각하게 훼손시키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만일 지구상의 모든 그리스도인이 다시는 건물을 교회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이것만 가지고도 우리 신앙에 혁명이 일어날 것이다.”

 

교회 건물에 대한 문제를 잘 요약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렇게 굳어진 전통을 헐어버리는 혁명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교회가 건물에 연연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신부인 유기적 공동체를 이룰 수 있을까요?

물론 앞에서 강조했듯이 교회 건물 없이 가정집에서 모인다고 해서 유기적 교회가 되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건물 문제 말고도 다른 많은 것이 해결되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유기적 교회를 이루려면 교회 건물이 방해요소라는 것쯤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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