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새로운 생명체의 거주지

 

***이 글은 미국 시카고에서 발행하는 기독교 신문인 <크리스찬 저널>의 요청으로 2010년 가을부터 2013년 가을까지 격주로 기고한 글입니다.

 

예수님짜리 교회 12

새로운 생명체의 거주지

 

지금까지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교회를 여러 각도에서 살펴보았습니다. 교회는 실로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존재임을 성경은 곳곳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짜리’의 가치가 있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 상속자가 된 존재입니다.

바로 앞에서 살펴본 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바치시면서 까지 예비하신 “거처(거할 곳)”가 곧 교회입니다.

창세 전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세우신 영원한 목적이 이루어지는 통로, 즉 아버지와 아들께서 누리시던 생명의 교제가 확장되어 그 모습을 드러낸 생명체가 교회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이 땅에는 없었던 새로운 생명체요. 새로운 종족입니다. 지금 이 땅에 있지만 실은 다른 세계에 속한 존재입니다.

이것을 깨달아야 온전한 복음을 알게 되는 것인데, 오늘날 개인의 영혼구원에 머물러 있는 반쪽 짜리 복음이 주를 이루고 있어 성경이 말하는 교회를 경험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지난 2천 년 동안 변질되어온 기독교 전통의 영향으로 복음이 흐려져서 성경과는 거리가 먼 돌연변이가 정상적인 교회의 모습처럼 여겨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므로 개인의 영적, 육적 필요를 채워주는 것에 올인 하다시피 합니다. 전도와 선교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반쪽 짜리 복음이 낳은 기형적인 교회의 모습입니다.

 

 

교회에 대한 개념의 차이

 

20여 년 전, 저는 미국에 온 후 17년 만에 처음 한국을 방문하여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제가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충청북도의 시골집에 갔습니다.

가기 전에 아이들에게 그곳에서의 즐거웠던 추억을 얘기해줬는데, 특히 아이들은 제가 어렸을 때 우리 집이 마을에서 제일 잘 살던 집이었다는 대목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시골집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궁금해했습니다.

 

21년 만에 본 고향집은 크게 변한 것이 없이 옛모습을 대부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나의 머릿속에 남아 있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저는 신이 나서 아내와 아이들에게 이곳 저곳을 데리고 다니며 설명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의 반응은 영 신통치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그 집이 전혀 ‘제일 잘 살던 집’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집과 미국에서 태어나 자란 아이들이 생각하는 집 사이에 커다란 개념의 차이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 ‘집’은 미국에서 그때까지 그들이 살았거나 가봤던 집이었고, ‘제일 잘 사는 집’은 그들이 방문했던 미국의 수영장 달린 큰 집이나 TV에서 봤던 호화판 저택이었습니다.

집에 대해 이런 개념을 갖고 있던 아이들에게 방 몇 칸에 대청마루 하나 붙어있는 집, 그리고 마당 건너 담벼락에 붙어 있는 냄새가 코를 찌르는 순 재래식 변소가 있는 곳은 ‘제일 잘 살던 집’은커녕 ‘집’이라고 부를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같은 단어를 사용해도 경험에 따라 이렇게 개념이 다를 수 있음을 그때 실감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라는 말을 똑같이 사용해도 경험에 따라 그 의미가 천차만별일 수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교회와 2천 년이 지난 오늘날의 교회의 모습이 천지차이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이것을 고려하지 않고 1세기 때의 교회가 오늘날의 교회 모습과 동일했을 것이라고 가정합니다. 오늘의 교회를 경험한 눈으로 성경을 읽기 때문입니다.

마치 저의 두 아들이 미국에서 화려한 저택을 보았던 눈으로 오래 전의 충청북도 시골 최고 부잣집을 마음 속에 자기 식으로 그렸던 것처럼 말입니다.

 

 

생명체의 고유 서식지(거주지)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생존하기에 필수적인 환경을 제공하는 서식지를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모든 생명체는 먹이, 물, 보금자리, 기후 등을 적절하게 공급해주는 고유의 서식지를 각각 갖고 있습니다. 그런 알맞은 서식지에서만 생명의 고유본능에 충실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고유 서식지가 파괴되거나 맞지 않는 서식지로 옮겨지면 생명의 고유본능에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됩니다.

예를 들면, 북극 곰은 지구의 온난화 때문에 북극 주변의 서식지가 점점 줄어들고 파괴되어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또 북극 곰을 따뜻한 플로리다 주 같은 곳으로 옮겨 비슷한 환경을 제공해주면 간신히 살기는 사는데 생식 능력을 상실하여 번식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고유 서식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두 살 때 시카고의 링컨 파크 동물원에 와서 20년 동안 살다가 죽은 부시맨이라는 이름을 가진 고릴라가 있었습니다. 몸무게가 무려 300 킬로그램 가까이 되는 초대형 고릴라였기 때문에 인기가 대단했습니다.

1950년 6월, 부시맨이 앓기 시작한다는 뉴스를 듣고 하루에 자그마치 12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문병을 왔을 정도였으니 그 인기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박제되어 시카고의 필드박물관 유리상자 속에 보존되어 있는 선택 받은 고릴라! 이만하면 팔자가 늘어진 동물 아닙니까?

 

하지만 이렇게 살았던 것이 고릴라의 생명에 충실한 삶이었습니까? 평생 철창 안에 갇혀 사람들의 노리개로 살면서, 그 몸 안에 꿈틀거리고 있던 고릴라의 생명의 고유본능에 역행하는 비참한 삶을 살았을 뿐입니다. 그 동물원은 고릴라의 고유 서식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고릴라들처럼 고유 서식지인 정글에서 자유롭게 뛰어다니며 생명을 만끽해야 했을 부시맨은 철창 안이 전부인 줄 알고 답답하게 살다가 간 불쌍한 고릴라였습니다.

 

생명체를 고유 서식지가 아닌 다른 환경으로 옮겨놓으면 생존은 가능해도 타고난 고유본능에 충실하게 살지 못하고 대부분의 기능이 퇴화되어버립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받고 위로부터 태어난 크리스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고유 서식지(거주지)를 벗어나 정체불명의 환경을 만들어놓고 교회라고 부르고는 거기에서 살아가는 크리스천이 오늘날 너무 많습니다.

철창이 전부인 줄 알면서 고유본능에 역행하며 살았던 부시맨처럼 반쪽 짜리 복음의 영향을 받은 교회생활이 전부인 줄 아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온전한 복음으로 돌아가서 그 복음을 살아가는 교회를 실현해야 합니다. 그런 거주지인 교회에서만 하나님께서 낳으신 새로운 생명체가 그 고유본능을 다 발휘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우리는 무의식 중에 1세기의 교회 성도들도 주일 아침에 옷을 잘 차려 입은 다음 성경책을 들고 잘 지어진 교회건물에 가서 주일 예배를 했을 것이라고 가정합니다.

교회당 앞쪽에 강대상이 있고, 강대상을 향해 놓인 의자에 앉아 예배 인도자가 인도하는 대로 예배순서를 따라 묵도와 찬양을 하고, 교독문을 교독하고, 대표기도를 듣고, 십일조를 바치고, 성가대의 특송을 듣고, 설교를 듣고, 축도를 받았을 것이라고 믿어버립니다.

그 때도 교회 헌법과, 제도와 조직, 그리고 프로그램과 형식이 있었을 것으로 단정해버립니다. 하지만 신약성경 어디에서도 이런 교회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런 오늘날의 교회 모습을 비판하면서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때의 교회에 교회건물이 없었기 때문에 가정에 모여서 가정교회를 해야 성경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1세기 때는 한 도시에 교회가 하나 밖에 없었으므로 오늘날도 그래야 한다고 주장하며 마치 자기들만이 초대교회를 이어받은 참 교회인양 행세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무조건 형식이 없어야 성경적이라는 사람들도 있고, 초대교회에 악기가 없었으므로 악기 없이 찬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룹도 있습니다.

또 그때는 만날 때 마다 떡을 떼었으므로 모임에선 항상 주의 만찬을 거행해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과연 이것이 초대교회로 돌아간 것일까요?

 

저는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초대교회도 교회마다 조금씩 달랐기 때문입니다.

문제투성이의 고린도 교회 같은 교회로 돌아가자는 말입니까? 주님께서 토해내고 싶었던 라오디게아 교회 같은 교회로?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지만 죽은 사데 교회로? 율법주의를 벗어나지 못했던 예루살렘교회로? 다 초대교회인데 어떤 모습의 교회로 돌아가겠다는 말입니까?

그래서 그런지, 오늘날 교회 이름 중 위의 교회들의 이름은 찾아 볼 수 없고, 빌라델비아나 안디옥이나 베레아나 빌립보나 서머나 같은 이름은 제법 눈에 띕니다.

 

그럼 소위 위의 좋은 교회들의 모습으로 돌아가면 초대교회로 돌아가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무작정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할 것이 아니라, 신약성경이 말하는 1세기의 교회들은 왜 그렇게 했을까, 즉 왜 교회건물이 없었을까, 왜 형식이 없었을까, 왜 헌법이나 제도나 조직이 없었을까, 왜 예배순서가 없었을까, 왜 오늘과 같은 예배인도자가 없었을까, 왜 오늘날과 같은 설교가 없었을까, 왜 모임에서 떡을 뗐을까…

이 “왜”에 대한 올바른 대답을 근거로 교회생활을 해야 합니다. 초대교회를 모방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왜”에 대한 답은 이미 위에서 설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낳으신 생명체는 그에 걸맞은 거주지인 교회 환경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 이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철창 같은 데 가둬놓고 생명의 고유본능이 상실된 채로 근근이 생존하기에 급급한 교회 환경으로는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세계에서 온 새로운 생명체가 생명을 만끽할 거주지를 실현하는 것이야 말로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시급한 과제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이미 이런 거주지(거처)를 예비해놓으셨는데, 우리가 그것을 경험하지 못하는 일차적인 원인은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그 다음 이해했더라도 왜곡된 전통을 타파하고 과감하게 그것을 역행하는 결단과 삶이 따라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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