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왜 신앙생활을 때우면서 할까?

 

***이 글은 미국 시카고에서 발행하는 기독교 신문인 <크리스찬 저널>의 요청으로 2010년 가을부터 2013년 가을까지 격주로 기고한 글입니다.

 

예수님짜리 교회 17

왜 신앙생활을 때우면서 할까?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교회는 이미 앞에서 자세히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의 창세 전 목적이 드러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요 신부인 인격체이기 때문에 어떤 전통이나 형식이나 제도나 교리에 상관 없이 주님과의 사랑의 교제에 치중해야 합니다.

성경 전체에 이 하나님의 목적이 그려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자 하면 교회가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바람직한지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앞에서 살펴본 대로 어떤 종교적 신념에 사로잡혀 있으면 판단력이 흐려지므로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는 이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를 파악하기가 힘듭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선입견을 가지고 있을 때 그 사람의 진심을 알기 힘든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이렇게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읽고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교회를 세워 주님과의 진정한 교제를 해야 하는데, 지난 2천 년 동안 교회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읽기 보다는 성경의 문자에 붙들리거나 성경을 짜집기해서 전통과 제도와 규범과 교리 같은 것을 세우기에 바빴습니다.

따라서 교회와 주님 사이의 인격적 교제보다는 주님을 섬기는 방법에 치중한 경향이 많습니다. 방법에 치중하다 보니 당연히 때우는 것에 급급하게 됩니다.

 

 

때우는 신앙생활

 

요한복음 2장에 보면, 요한복음의 저자가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를 통해 1세기 말의 교회 모습을 드러낸 장면이 나옵니다.

1세기 말의 교회가 마치 포도주가 떨어져 기쁨이 빠진 혼인잔치와 같고, 성전 안에서 대놓고 장사를 할 정도로 타락한 유대교의 제사제도와 같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개입하셔서, 혼인잔치에선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고, 성전에선 소동을 일으키셨듯이 교회도 예수님께서 주도하셔야 함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2천 년 후인 오늘날엔 예수님께서 교회에 어떻게 개입하셔야 할까요?

 

그런데 흔히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행하신 일을 ‘성전 청소’ 라며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건 청소가 아니라 ‘소동’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제사를 방해하신 것이지 뭘 청소해서 다시 사용하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또 이것을 교회에서는 뭘 사고팔고 하면 안된다는 식으로 적용하기도 하는데 이것이 포인트가 아닙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의 제사를 방해하시며 하나님께서 ‘이 따위 제사’는 받지 않으신다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사를 받지 않으신 좋은 예가 창세기 4장에도 나옵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는데, 왜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을까요?

우리가 다 알 수는 없겠지만 가인은 하나님의 마음과는 거리가 멀었고 그저 제사를 때우는데 급급했었던 것 같습니다.

만일 그가 진정 하나님께 올바른 제사를 드렸는데도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셨다면 하나님께 겸손하게 여쭈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무엇을 잘못 했습니까? 제가 드린 제사에 무엇이 빠졌습니까? 저 나름 대로 최선을 다했는데 어디서 잘못되었는지 가르쳐주소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온전한 제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저도 그런 제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이런 자세로 나왔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제사를 받지 않으신 후 그의 태도를 보면 그가 제사를 그냥 때워버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 4:5).

이것은 마치 “갖다 바치는 대로 받으실 것이지 까다롭게시리 뭘 그리 따지십니까?” 라는 식입니다. 하나님의 마음과는 거리가 한 참 먼 가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겉에서 볼 때는 형식과 제도를 갖추었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때우기에 급급한 것입니다. 이것이 가인의 제사이고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 제사였습니다.

제사의 형식을 갖추면 된다는 이런 태도에 당연히 따라오는 것이 있습니다. 편의주의입니다. 어떻게 하든 제사만 드리면 되니까 쉽고 편한 것을 모색하게 됩니다.

“불편하게시리 성전 밖에서 짐승을 사거나 돈을 바꾸거나 할 필요가 뭐 있나? 성전 안에서 제물을 사서 곧바로 제단에 바치면 되지.” 이런 생각이 따라오게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렇게 하나님의 마음과 의도에 관심이 없으면 온갖 제도와 형식을 만들어 그것을 쉽고 편리하게 때우는 것이 신앙생활로 둔갑해버립니다. 물론 나중에 가면 그것이 큰 부담이 되지만.

만일 매일 아침 부모님께 문안 드리는 것이 효도라면 이것처럼 쉬운 효도가 어디 있겠습니까? 부모님을 사랑하고 공경하지 않아도 효자, 효녀인 것을 나타내기 위해 매일 아침 부모님께 문안인사를 하며 때우려고 할 것입니다.

사극을 보면 대비와 세력 다툼을 하는 중전이 매일 꼬박꼬박 대비전에 문우 드리러 가는 모습이 나오는데 바로 이것이 때우는 효도의 좋은 예일 것입니다.

선을 그어놓고 “여기까지 하면 효도이고 이 아래부터는 불효다” 이런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음 속 깊이 부모님을 사랑하는 자식은 효도를 쉽게 생각해서 무슨 형식을 갖춰 쉽게 때우려 하지 않고 부모님의 마음을 알아드리는데 치중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마음과 의도는 알려 하지 않고 기독교의 전통과 제도와 형식과 교리에 따라 무턱대고 따르는 것들을 대라면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 중에는 성경에 있기 때문에 해야 된다는 것들도 있고, 교회 밖의 이교사상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교회 안에 들어와서 기독교의 옷을 입고 있는 것들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해야만 좋은 신앙이라는 분위기 속에서 때로는 노골적으로, 때로는 은근하게 압력을 받으며 때우게 됩니다.

 

 

때우는 신앙생활의 예: 주일 성수

 

이것을 건드리면 목사님들로부터 이단이다 삼단이다 라는 공격을 받기 십상인데, 주일 성수가 바로 ‘성경에 있기 때문에 지켜야 한다’는 것의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안식일이 신약에 와서 주일로 바뀌었기 때문에 주일은 교회당에 와서 예배를 해야만 한다는 제도가 은근슬쩍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많은 사람이 일요일에 예배를 때우게 됩니다.

물론 기꺼이 즐겁게 예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반면 때우는 사람들 또한 만만치 않게 많이 있습니다.

 

주일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실 것 같은 두려움 속에, 식당이나 공원 같은데를 가면 안된다는 극단적인 경우부터 주일 예배만 때우면 안심이라는 식까지 다양한 양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주일에는 공부도 하면 안된다고 해서 내일이 시험인데도 절대로 시험 준비하지 못하고 일요일 밤 12시가 되기를 기다렸다가 12시 정각에 공부 시작하는 학생들도 있습니다.

이전에 유럽여행을 가서 차를 타고 스페인 바르셀로나를 지나다가 타이어에 펑크가 났는데 그날이 일요일이라서 그 크나큰 도시인 바르셀로나 전체에 타이어 고칠데가 한 군데도 없다는 사실에 놀란 적이 있습니다. 카톨릭 국가에서나 볼 수 있는, 주일 성수의 위력이 실로 엄청남을 경험했습니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분들 중 주일을 지키지 않고 여행이나 하니까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셨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바로 그런 분들이 때우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 안식일과 주일이 등장하긴 하지만 신약성경 어디에도 안식일이 주일로 바뀌었다는 개념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물론 초대교인들이 안식일을 지켰다거나 사도들이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한 적도 없습니다. 다만 안식 후 첫날 곧 일요일에 모였다는 기록이 몇 군데 있고, 그날을 주일이라고 부른 경우가 한두 군데 등장합니다. 그리고 어디에도 주일을 지켜야 한다는 암시조차 없습니다.

따라서 초대교회에는 주일 성수의 개념 자체가 없었으므로 주일 예배를 때우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그들에겐 주일도 없고 주일 예배도 없었단 말입니까? 이것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루겠습니다.

 

 

때우는 신앙의 예 또 하나: 십일조

 

누가 말하기를 십일조를 건드리면 스데반처럼 돌 맞아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지만 이것이야말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사안입니다. 우선 돌 맞지 않기 위해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온전한 복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는 사람이라면 십일조 정도가 아니라 십의 5조나 십의 10조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이루신 이후엔 신약성경 어디에도 십일조 라는 말이 등장하지 않는데도, 오늘날엔 십일조가 신앙의 척도가 되다시피 합니다. 그래서 좋은 신앙인으로 살기 위해 당연히 십일조를 때우는 사람들이 생기게 됩니다.

그리고 십일조를 Gross Income에서 해야 한다는 교회 지도자들과 세금을 공제한 다음 Net Income에서 해도 된다는 교인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줄다리기가 존재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코메디인데, 돈이 관련되어 있어 심각한 코메디가 연출되곤 합니다.

어쨌든 사람의 최대 관심사인 돈이 결부되어 있어 십일조를 기꺼이 드리는 사람보다는 때우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게 되고,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기꺼이 드리는 사람 중에도 그 마음 속을 들여다보면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으려는 은근한 욕심(?)이 도사리고 있는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물론 노골적으로 축복 받기 위해 십일조를 정확히 계산해서 내는 속물 신앙도 있지만.

하지만 구약성경대로 진짜 십일조를 하려면 수입의 십분의 1이 아니라 십분의2와 1/3 곧 23.3333… 퍼센트를 바쳐야 한다는 성경적 사실은 외면해버립니다.

 

그런데 문제는 십일조가 성경적이긴 하지만 복음적이지는 않다는데 있습니다. 이건 또 무슨 말입니까? 성경적인데 복음적이지 않다니… (이것에 대해서도 다음에 다루겠습니다.)

그래서 이미 성경을 보는 눈에 관해 앞에서 여러 번 강조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 성경을 보는 눈에 이상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을 왜곡해서 받아 들여 많은 잘못된 전통과 제도와 교리가 생겨났고, 그것들이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때우는 신앙생활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때우는 신앙생활로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교회생활이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참 교회생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몸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사랑에 빠진 신부로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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