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왜곡된 거주지 (1)

 

***이 글은 미국 시카고에서 발행하는 기독교 신문인 <크리스찬 저널>의 요청으로 2010년 가을부터 2013년 가을까지 격주로 기고한 글입니다.

 

예수님짜리 교회 13

왜곡된 거주지(1)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린도 후서 5:17)

 

위의 말씀은 기독교인이면 누구나 달달 외우다시피 하는 성경구절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의 구원 간증에 단골로 등장하곤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피조물”로 번역된 단어는 실은 ‘창조세계(creation)’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새로운 생명체가 살아갈 새로운 거주지, 곧 이 땅에 있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교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것을 요한계시록은 다음과 같은 계시문학체로 표현했습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요한 계시록 21:1-5)

 

하나님께서 처음 것들(옛 창조세계) 대신에 만물을 새롭게(새 창조세계) 하신 것, 즉 죽은 다음에 갈 어떤 장소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하늘에서 이 땅에 내려온,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하시는 거처에 대한 설명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에서 말씀하신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께서 오셔서 거처를 삼으신 교회에 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새로운 생명체가 살아갈 새로운 거주지를 말합니다.

 

 

왜곡된 교회 환경

 

이 새로운 거주지는 앞에서 이미 언급한 것처럼 새로운 생명의 고유본능을 충분히 발휘하고 만끽할 교회 환경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근근히 생명을 유지하는데 급급한 환경을 교회라고 해왔기 때문에 새로운 생명체인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나날이 질식되어갑니다. 기독교 2천 년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고도 남습니다.

 

그것은 마치 강이나 바다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며 서식해야 할 물고기를 좁디좁은 수족관이나 어항에 가둬놓고, 정글에서 마음껏 누비며 다닐 사자를 동물원의 철창에 가둬놓고 거기가 진짜 서식지나 다름 없다고 우기는 것이나 일반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새로운 생명체를 비 성경적인 전통, 교리, 율법, 예배, 제도, 조직, 시스템 같은 틀에 묶어놓고 그것을 벗어나면 큰일 날 것처럼 세뇌시키는 기독교 종교가 만들어낸 왜곡된 교회 환경이 바로 이렇습니다.

 

 

어떤 신발 이야기

 

제가 유년시절을 보낸 1950년대에서 1960년대 초반의 한국 농촌에서는 아이들이 구두나 운동화를 신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잘 사는 집을 제외하곤 대부분 검정 고무신을 신던지, 집안 형편이 조금 괜찮으면 약간 더 비싼 흰 고무신을 신었습니다.

형제가 많은 집에서는 보통 아랫동생들은 새 고무신 한 번 제대로 신은 적이 없고, 큰형이 신던 고무신을 이어받아 몇 명을 거쳐야만 닳고 닳은 고무신이 막내에게 주어지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 고무신도 오래 신기 위해 학교에 갈 때나 겨울을 제외하고는 주로 맨발로 다니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그러다가 어쩌다 어디서 헌 구두나 운동화가 굴러 떨어지는 경우에는 신발이 발에 맞고 안 맞고는 상관없이 기회를 놓칠세라 무조건 얻어내고 봅니다.

이런 경우에 신발이 발보다 커서 헐렁하면 좀 낫지만, 신발이 작아서 꽉 끼게 되면 발가락을 오므리고 신어야 하는 불편함과 아픔을 감수해야 합니다. 구두나 운동화는 고무신과는 달리 별로 신축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발에 맞지 않으면 그 신발이 맞는 다른 아이에게 주겠다고 도로 가져갈까봐 고통스러워도 얼굴에 웃음을 디며 “어쩌면 이렇게 내 발에 꼭 맞지?” 라고 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그 시대엔 발을 신발에 맞추어야지 신발을 발에 맞춘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 가난한 시골에서 발에 맞는 신발이 나타나기를 바라는 것은 망상에 가까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발에 맞지도 않는 구두나 운동화에 억지로 발을 쑤셔넣고 또 넣는 것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신발이란 으레 이런 것이다’ 라고 여기게 됩니다. 발에 꼭 맞는 신발을 신어본 적이 없으므로 비교대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시골 아이들에게 있어 구두나 운동화는 ‘발을 불편하게 하고 아프게는 하지만, 밖에 나갈 때 신고 가서 다른 아이들에게 자랑할 수 있고, 겨울에는 고무신보다 발을 더 따뜻하게 해주는 것’ 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상이 아닌 비정상이 정상으로 굳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지나 장성해서 발에 꼭 맞는 구두나 운동화를 신게 되었을 때의 그 편안함이란 느껴보지 못한 사람은 알 수 없는 기분 좋은 것입니다. 마침내 무엇이 정상적인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신발은 고무신이든 구두나 운동화든 간에 발에 꼭 맞는 것을 신는 것이 정상적이라는 것! 그동안 그것을 알면서도 비교대상이 없었기 때문에 꽉 기는 신발에 만족했었지만, 이제 실제로 꼭 맞는 신발을 신어보고서 경험적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한국이 가난했을 때 농촌에서 누구나 경험했을 법한 위의 이야기가 또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경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성경이 말하는 교회 환경을 본 적이 없으므로, 즉 비교대상이 없으므로 왜곡된 교회 환경을 정상인 줄로 믿고 그런 교회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꼭 기독교 간판을 내건 이단이나 사이비, 또는 가톨릭 같은 부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위 개신교 정통 교회, 복음주의 교회 안에서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 것이 아닌 교회 밖의 세상에서 흘러들어온 것들이 기독교의 옷을 입고 감쪽같이 정통 행세를 하고 있기 때문에 속아 넘어가기 쉽습니다.

 

 

콘스탄틴의 십자가가 교회에 끼친 영향

 

4세기의 로마 황제 콘스탄틴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평가는 극과 극으로 나뉩니다. 기독교의 발전에 가장 큰 공헌을 했다고 보는 견해와 교회를 타락시킨 주범으로 보는 견해가 바로 그것입니다.

저는 후자에 속하는데, 콘스탄틴이 이해했던 십자가의 정체를 바로 알게 되면 그가 교회에 끼친 폐해가 얼마나 극심한지가 확연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가 이해했던 십자가가 실로 오늘날까지 비 성경적인 교회 환경을 계속 양산해내고 있습니다.

 

콘스탄틴(274? – 337)은 서로마제국을 다스리던 두 명의 황제 중 하나였는데, 다른 한 명인 막센티우스와 5년간의 전쟁 끝에 승리해서 서로마제국의 유일한 황제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승리를 가져다준 마지막 전투가 서기 312년 10월 28일에 있었던 그 유명한 ‘밀비안 다리 전투’ 입니다.

그는 자신의 군사 수보다 적어도 네 배가 넘는 막센티우스의 군대를 맞아 싸워야 하는 힘든 상황에 직면했는데, 전날 저녁 지는 해가 십자가 모양으로 비치고 그 위에 헬라어 알파벳 두 글자가 겹쳐 있는 표시가 나타나더니 “이 표시를 사용하여 네가 정복하리라” 라는 음성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가 봤다는 헬라어 알파벳은 ‘카이’(chi)와 ‘로’(rho)인데, 그는 이것을 ‘크리스토스’(그리스도)의 처음 두 글자라고 해석했습니다.

이 표시를 즉각 자신의 모든 군사의 방패에 그려넣도록 했던 그가 이튿날 전투에서 막센티우스를 물리치고 승리를 거두게 된 것이 교회가 삽시간에 타락하게 된 시발점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콘스탄틴은 십자가와 두 글자를 자신에게 보여준 존재가 그리스도인들의 ‘신’인 예수 그리스도라며 서로마제국에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를 중지할 것을 명령했고, 이듬 해인 서기 313년에 ‘밀라노칙령’을 발포하여 종교의 자유와 함께, 몰수했던 교회재산을 모두 교회들에 반환시켰습니다.

이때부터 기독교가 기득권을 가진 종교가 되었습니다. 서기 324년에 동로마제국까지 손에 넣은 콘스탄틴이 명실공히 로마제국 전체를 다스리는 황제가 되면서 기독교의 위상은 그야말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습니다.

멸시와 박해를 받으며 약하디 약하던 모습의 교회가 황제의 비호를 받으며 졸지에 가장 힘있고 인기 있는 종교로 변모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불이익을 당하지 않기 위해 너도 나도 교회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교회 안에서는 하나님의 생명의 그림자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심판의 대상인 이 세상 나라와 교회가 하나가 된 것입니다.

자유롭게 예수 그리스도 안의 새 생명을 만끽할 거주지요,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예수님의 공동체인 교회가 이제 이 세상의 원리를 따라 크고 화려하고 높고 부유하고 힘있는 것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런 위상에 걸맞은 교회를 만들려니 교회 건물이 웅장해지고, 제도를 세우고, 조직을 짜고, 교회의 자연스런 주님과의 교제 모임을 구약의 제사를 방불케 하는 예배로 바꾸고, 성직자 계급을 만들어 주님의 거룩한 성도들을 평신도라는 하층계급으로 전락시키고, 세상적으로 수준있는 지도자를 세우고, 법과 규례를 정하여 교인들을 컨트롤하는 등 성경과는 거리가 먼 교회의 모습이 출현했습니다.

콘스탄틴이 봤다는 십자가가 가져온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새로운 생명체의 거주지를 도둑맞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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