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굽과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온갖 놀라운 기적을 다 체험하고도 하나님의 목적인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를 거절한 이스라엘을 볼 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말하는 오늘날의 우리도 그들이나 별반 다름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안식을 이미 주셨기 때문에 믿음으로 들어가서 깃대만 꽂으면 되는데도 어째서 절대 다수의 이스라엘 백성은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을까요?
그리고 오늘날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의 집합체인 교회생활의 풍성한 안식 또한 믿음으로 깃대만 꽂으면 되는데 어째서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그런 교회생활을 경험하지 못하고 광야같은 신앙생활에서 끝나고 마는 것일까요?
우리는 앞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답은 생각보다 아주 간단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 몸뚱아리만 나왔기 때문입니다.
좀 심하게 표현하면, 그들은 영혼은 애굽에 놔두고 고깃덩어리만 광야로 나왔습니다.
그래서 심심하면 다음과 같이 불평 불만을 쏟아냈습니다.
고깃덩어리들의 입에서 나온 말을 다시 정리해봅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애굽에 있을 때가 우리에게 좋았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여호와께서 우리를 미워하시므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 넘겨 멸하시려고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도다.”
말을 해도 아주 싸가지 없이 하지 않습니까?
이 싸가지 없는 말들에서 그들의 속물 가치관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들은 애초부터 하나님의 목적보다 자신들의 안위가 더 중요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신상에 위협이 오면 언제나 애굽을 그리워해서 돌아가고자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영혼은 애굽에 그대로 있고 몸뚱아리만 광야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항상 불평 불만만 쏟아냈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아래는 위의 싸가지 없는 말들과는 대조적인 그들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 (출 14:31)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여호와께서 영원무궁 하도록 다스리시도다.” (출 15:1 – 18)
“모세가 내려와서 백성의 장로들을 불러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그 모든 말씀을 그들 앞에 진술하니 백성이 일제히 응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출 19:7 – 8)
“모세가 와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의 모든 율례를 백성에게 전하매 그들이 한 소리로 응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출 24:3)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출 24:7)
이스라엘 백성의 이 모습만 보면 흠잡을데 없는 훌륭한 신앙인이고 위의 “애굽”을 그리워하는 싸가지 없는 모습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영혼은 애굽에 있고 몸뚱아리는 광야에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런 변화무쌍한 모습의 연출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이 혹시 오늘날 교회당을 열심히 드나드는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영혼은 세상에 있고 정장을 한 몸은 예배당 안에서 멋진 신앙의 고백을 하며 봉사하는 변화무쌍한 모습.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과 의도에 관심이 있을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고 싶은 일 곧 하나님의 필요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자신의 필요와 안위와 신상의 이로움을 위해, 복을 받기 위해, 상급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믿어주었고 또 하나님을 섬겨주는 신앙생활에 열심을 낸 것 뿐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자기의 필요를 얻기 위해 하나님에게 크게 인심 써주는 신앙생활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의를 위해, 지상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세계 복음화를 위해,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기 위해… 등등 온갖 좋은 명제를 갖다 붙이고, 겉으로 볼 때는 아주 헌신적이고 희생적이고 충성스러울 수도 있지만, 실은 자신의 야망을 비전으로 포장한 속물근성에 지나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저 자신이 이전에 주님 위해 열심히 사역한다고 했을 때 저의 마음 속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던 “하나님에게 쓰임받는 쾌감”이 이를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막대기도 쓰시고, 뱀도 쓰시고, 바다도 쓰시고, 강도 쓰시고, 나귀도 쓰시고, 발람도 쓰시고, 사울왕도 쓰시고, 가룟 유다도 쓰시고, 심지어는 마귀도 쓰시는 주님께서 나도 쓰셨다는 사실 앞에서 뭔가 깨달아야 하는데 하나님에게 쓰임받는 것이 대단한 줄 아는 착각 속에 살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전부 다 자기 중심, 자기 사랑에서 나온 것인데도 하나님을 위한다는 겉포장에 교묘하게 가려져 있을 뿐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가나안 안식이 예시하는 바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사는 교회생활은 아무나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거기는 자신을 버리고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목적에 집중하는 사람들이 들어가서 경험하는 차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자신을 버리고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목적에 집중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나님의 백성도 아니면서 이것을 알고 경험하고 누리게 된 사람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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