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미국에 온 저같은 사람들도 한국에 있는 사람들 못지 않게 미국에 진출한 한국 운동선수들에게 큰 기대를 걸고 그들이 대활약을 했을 때 절로 기분이 좋아지게 됩니다.
그런 운동선수들의 효시라 할 수 있는 박찬호 선수가 20년 전 제가 그 당시 살고 있던 샌 프란시스코 지역에 와서 그 지역팀인 Giants 야구팀과 경기를 한다고 했을 때 교인 여러 명과 함께 야구장에 가서 응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박찬호 선수가 Giants의 라이벌인 LA Dodgers팀 투수였기 때문에 우리는 홈팀 관중들의 야유를 받아야했지만 아랑곳없이 열띤 응원을 보냈는데, 그 전까지 제법 잘 하던 박 선수가 그날 따라 컨디션이 좋지 않았는지 힘겹게 던지다가 점수를 많이 주고 강판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때 모처럼만에 한국 선수가 왔다고 해서 큰 기대를 걸고 경기장에 갔다가 허탈하게 돌아온 이런 기억이 있는데, 어제도 볼티모어 Orioles 야구장에 가서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한국 선수를 응원하러 갔다가 또 다시 허탈하게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예전과 달리, 한국 야구도 수준이 높아져 요즈음엔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는 선수들이 늘어나서, 제가 지금 살고 있는 와싱톤 인근 볼티모어 지역의 Orioles 야구팀에도 한국의 김현수 선수가 입단했다는 소식에 내심 기뻐하던 차에, 이를 알게 된 저의 아들이 한달 전에 저의 생일 선물로 Orioles의 홈 경기 야구 티켓을 준다고 해서 큰 기대를 걸었습니다.
더구나 Orioles 팀이 금년 시즌 첫 대결하는 팀이 미네소타 Twins 인데, 그 팀에도 한국의 홈런 타자 박병호 선수가 입단했으므로 한꺼번에 한국 선수 두 명의 활약을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컸습니다.
특히, 저의 아들은 Orioles의 좌익수인 김현수 선수를 제가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도록 좌측 외야석 가장 첫 줄을 일찌감치 확보해놓았는데, 지난 한 달 동안의 스프링캠프에서 김 선수가 워낙 부실한 결과 구단과의 관계도 좋지 않아 경기에 나올 가능성이 희박해졌으므로 그에 대한 기대는 아예 접고, 미네소타 Twins의 박병호 선수에게 기대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어제 열린 시즌 두 번째 경기의 외야석 맨 첫 줄에 앉아 바로 눈 앞에서 왔다 갔다 하며 수비를 보는 Orioles 의 좌익수 Joey Rickard 선수를 보며, 원래는 저 자리가 김현수 선수의 몫이 되어야 한다는 아쉬움 속에 경기를 관람하면서 박병호 선수가 타석에 들어설 때마다 안타나 홈런 하나쯤 쳐주기를 바랐지만, 결과는 첫 타석에는 볼넷, 그리고 나머지 세 타석엔 연속 삼진 아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Foul ball 이외에는 방망이로 공을 때려본 적이 없이 경기가 끝나고 말았으니, 가장 아쉽고 답답한 사람은 물론 박 선수 장본인이었겠지만 저 역시도 허탈감이 밀려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경기 내내 볼티모어 Orioles의 더그아웃에서 무표정으로 앉아 있는 김현수 선수와 4타수 무안타에 삼 연속 삼진을 당한 박병호 선수를 보며 안타까운 마음 그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안타까움이나 허탈감이야 이후에 박병호 선수나 김현수 선수에게 기회가 더 주어져 제 실력을 발휘하면 얼마든지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들이 지금은 한국 야구와는 다른 미국의 메이저리그 풍토에 적응하느라고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지만 앞으로 빛을 발할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
저는 그들이 잘 하든 못 하든 앞으로도 계속 응원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 살면서 벌어지는 육적인 일들에 의해 생기는 아쉬움이나 허탈감은 그 무엇이라도 “그냥 그런가 보다” 하며 지나쳐버릴 수 있습니다.
그런 것들엔 영원한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 끝날까지 정말 가장 아쉽고, 안타깝고, 허탈한 것이 있는데, 사도 바울이 디모데 후서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한 것들이 그런 여운을 남기는 것 같습니다.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는 부겔로와 허모게네도 있느니라.” (딤후 1:15)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딤후 4:10)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딤후 4:16)
바울이 네로 황제 앞에서 첫 번째 재판이 끝난 후 두 번째 재판(결심 공판)을 앞두고 멀리 있던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안타깝고 허탈한 마음을 털어놓은 대목들입니다.
바울의 말년에 그와 마음이 통했던 그리 많지 않았던 동역자들 중 하나인 사람, “사랑하는 아들”(딤후 1:2) 이라고 불렀던 디모데에게 만큼은 자신의 속내를 숨기지 않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교회를 위해 함께 복음으로 살다가 도중 하차한 수많은 사람, 그리고 이런 저런 이유에 의해 더는 함께 하지 않는 대다수의 사람들을 지켜보는 안타까움과 허탈감이야말로 두고두고 가슴에 남을 수 밖에 없음을 바울의 표현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버림받았을 때의 바울의 심정을 우리가 어떻게 다 헤아릴 수 있겠냐마는 복음을 위해 사는 과정에서 얼마든지 벌어지는 일이므로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도 남의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래도 바울은 이런 허탈한 상황을 디모데 후서 4:16에서 이렇게 받아 들일 수 있었습니다.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바울에겐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 23:24)
우리가 잘 아는, 십자가에 달리셔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을 향해 하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라 살다가 우리가 당하는 허탈한 상황에서 우리가 취해야 하고 또 취할 수 있는 태도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이신 그리스도와 하나된 교회의 지체들에게도 하나님의 생명이 있고 그리스도의 믿음이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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