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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9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만나지 못하면?

 

비행기 안에서 책

 

지난 달 한국 방문 때 잠깐 서점에 들러 신간서적을 둘러보다가 [예수냐 바울이냐] (문동환 저, 삼인 출판사 간) 라는 제목의 흥미로운 책을 발견하고 구입해서 미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읽었습니다.

이 책이 어떤 책이냐는 이 책에서 인용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면 대충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 신학은 예수를 유대민족이 대망하던 메시아라고 주장함으로써 예수가 창출한 ‘생명문화공동체운동’을 곁길로 오도하였다…”

“예수의 십자가란 우리들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한 대속이라기보다는 마지막 각성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이 예수를 하느님의 독생자라 하며 본질적으로 하느님과 같다고 한 것도 머릿속에서 나온 관념에 불과하다…”

“바울을 위시한 원시교회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은 그들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함이라고 이해했다. 그러나 하느님은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달리게 하시고, 그 피 값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옹졸한 분이 아니시다…”

“바울의 메시아론은 다윗 왕조가 조작한 것보다 훨씬 더 불경스럽다. 다윗 왕의 후손을 하느님과 본질적으로 동등하다고 선언한 것이다. 바울은 어떤 근거에서 이런 선언을 할 수 있었는가? 아무런 역사적인 근거를 댈 수가 없다. 이것은 신화시대에 예수를 신격화하면서 조성한 자들의 생각일 뿐이다.”

“예수는 구도자였다. 기득권자들의 억압과 수탈 속에 죄인 취급을 받는 떠돌이들을 보면서 그들이 인간답게 사는 생명의 길을 찾으셨다… 그 결과 그는 야훼 하느님과 기화하여 악의 뿌리를 발견하고 동시에 평화와 기쁨이 차고 넘치는 생명의 길을 찾으셨다…”

“예수는 삶을 통해서 진리를 전했다. 그의 관심은 새로운 삶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사랑으로 먹을 것을 나누시고, 병을 고쳐주시고, 그들이 죄인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죄인이라고 하는 자들이 더 죄인이라고 언명하셨다. 고생을 겪으면서 아우성치는 떠돌이들이 하느님 나라에 더 가깝다고 깨우쳐주셨다. 그렇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인간으로서 당당하게 서도록 하셨다… 그러나 바울은 그의 복음을 말로만 전했다. 그 복음의 내용이 삶을 통한 것이 아니라 머리로 조작한 관념이기 때문이다…”

 

예수냐 바울이냐

 

이 책의 저자는 제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 청년시절에 좋아했던 분입니다. 그가 유신 시절 어려움을 무릅쓰고 형인 문익환 목사와 함께 형제가 민주화운동에 앞장 섰었기 때문에 존경했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제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보니 그가 말하는 복음이 성경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구순을 훨씬 넘긴 지금도 그가 여전히 똑같은 주장을 하고 있음을 이 책을 통해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2천 년 전에 진리를 추구하고 깨달아서 세상을 바꾸려 한 하나의 훌륭한 인간으로 보니까,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만나서 그분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알고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운 바울을 예수님의 복음을 관념적으로 조작한 불경스런 사람으로 보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읽었던 누가복음 주석 말미에 이 주석의 저자가 누가복음 24장의 풀이를 아래와 같은 말로 시작하는 것을 보았는데, 이 사람도 위에서 말한 분과 같은 시각으로 예수님을 하나의 인간으로 보았습니다.

“누가복음의 저자인 누가가 예수의 부활 전설이 마치 사실인양 기록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근 40년 전에 읽은 내용인데도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것은 제가 그 주석을 읽고 얼마 되지 않아 그 저자를 직접 만났기 때문입니다.

저의 아버지 1주기 때 누나 집에 가서 추도식에 참석했는데 인도자가 바로 그였습니다.

누나가 다니는 교회에 담임목사로 최근에 부임했으므로 그가 그 추도식을 인도하게 되었는데, 메시지의 내용에 예수 그리스도는 아예 없고 “아무개 교수가 말하기를…”, “철학자 아무개가 말하기를…”, 뭐 이런 말만 늘어놓기에 바빴습니다.

 

Screen Shot 2012-04-13 at 9.08.29 PM

 

적어도 그리스도인의 추도식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생명(영생)에 관해 얘기하는 것이 기본인데, 예수님을 죽었다가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계신 주님으로 믿지 못하니 그분의 생명을 경험할 수 없으므로 슬금슬금 저의 눈치를 보며 강론하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그가 왜 저의 눈치를 봤냐고요?

누나가 그에게 “동생이 예수님을 잘 믿는다” 고 소개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고 죽으신 구원자로, 생명의 주님으로,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성령에 의해 교회라는 몸으로 이 땅에 계시는 교회의 머리로 만나지 못하면 이런 사람들처럼 예수님을 진리를 추구했던 하나의 인간으로 밖에 알 수 없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믿지만 하나님의 창세 전 목적의 종착역이 이 땅에서 영원까지 지속될 교회라는 사실을 모르므로 여기서 영생을 마음껏 누리지 못하고, 죽은 후에야 천국이 있을 것이라고 믿고 종교제도에 묶여있는 그리스도인들도 안타까운데,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더 그렇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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