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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3

영생을 맛보는가, 누리는가? (3)

 

 20140918_161707

 

“보남파초노주빨”

이것은 제가 어렸을 때 시골에서 살면서 외운 무지개의 색깔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서울로 이사 왔는데 서울의 친구들은 무지개의 색깔을 “빨주노초파남보” 라고 해서 잠시 그것이 생소했던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쪽에서 시작하든 관계없이 무지개의 색깔을 전부 다 표현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비온 후에 가끔 일곱 가지 색깔이 어우러져 하늘에 펼쳐지는 영롱한 무지개를 볼 때마다 우리는 그 아름다움에 감탄을 합니다.

지난 달 볼리비아에 갔을 때 차창 밖 낭떠러지 아래에서부터 위로 펼쳐진, 아주 가깝게 보이는 무지개를 보며 아내와 동시에 감탄사를 연발했었는데 그것은 지금까지 제가 수도 없이 많이 본 무지개 중 가장 색깔이 선명한 무지개였습니다.

반사적으로 셔터를 눌러 찍은 사진 속의 무지개와는 달리, 실제로 본 무지개는 일곱 가지 색깔을 다 쉽게 구분할 수 있을만큼 선명했습니다.

 

무지개는 여러가지 색깔이 다 어우러져 보일 때 아름답지, 한두 가지 또는 서너 가지 색깔만 보이고 나머지는 있는가 마는가 하다면 그다지 멋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영생이 무엇인가를 논할 때 마치 몇가지 색깔만 보이고 나머지는 희미하게 보이는 무지개처럼 그 의미가 축소되고 그것을 맛 보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면 그건 하나님께서 주신 아까운 인생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희미한 무지개

 

그렇다면 왜 우리가 축소된 의미의 영생 밖에 모르고 또 영생을 맛보는 수준에 머물러 있을까요?

우리가 그 이유를 다 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아마 우리가 받은 복음이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무지개의 일곱 가지 색깔 전체는 보이지 않고 어떤 특정한 색깔 몇 개만 보이듯 복음의 내용 전체를 모르고 한두 가지에 꽂혀 있기 때문에 영생을 누리지 못하고 맛보는 정도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십자가, 부활, 승천, 성령강림, 교회가 선명하게 하나로 어우러져야 하는데 보통 이 중 한두 가지만 특별히 강조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모든 요소가 한 패키지인데 이것들 중 한 가지를 따로 떼어 강조해서 나온 경험을 전부로 알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생을 충만히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오늘날 십자가만 특별히 강조하는 경우, 부활의 능력에만 매달려 있는 경우, 성령에만 꽂혀 있는 경우, 교회가 무엇인지 제대로 모르면서 교회, 교회, 공동체, 공동체 하는 경우… 이렇게 한가지에만 올인할 경우에 영생의 의미는 축소되고 맙니다.

 

이게 다름 아닌 저 자신의 이전의 신앙생활 중 어떤 시점에서 볼 수 있었던 저의 모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분명 영생을 맛보는 것엔 의심의 여지가 없었지만 그것을 충만히 누린다고는 말할 수 없는 상태로 살았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영생을 누리고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더 분명히 이해되고 경험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영생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려면 우선 온전한 복음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온전한 복음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gosp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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