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적 교회란 무엇인가? 명확한 분별이 요구됨 (프랭크 바이올라) (1)
***아래의 글은 프랭크 바이올라가 그의 블로그에 쓴 글입니다. 그의 허락을 얻어 우리말로 번역한 것입니다.
나는 1993년부터 “유기적 교회” 라는 말을 사용해왔는데, 내가 쓴 책인 다시 그려보는 교회에서 이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이 오스틴 스팍스임을 밝혔습니다.
오스틴 스팍스는 1920년대부터 그가 세상을 떠난 1971년까지 사역한 일꾼입니다.
약 20년 전 내가 “유기적 교회” 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했을 때 이 말을 사용한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예외가 있다면 오스틴 스팍스가 쓴 글과 책들에 익숙한 사람들 뿐이었습니다.)
오늘날에 와서는 이 말이 유행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 각기 다른 여러 의미로 변형되는 점토와 같은 단어가 되어버렸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유기적 교회” 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올바로 정의해야 합니다.
나는 종종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의 유기적인 표현은 지체들이 함께 신적 생명을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을 뜻한다.
그들이 내재하시는 그리스도에 의해 사는 법을 배우는 것.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에서 특별한 표현이 생기는 것.
그것이 생명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이 표현이 “유기적”이라는 것.
교회가 유기체로서의 자신에게 충실하게 살 때 그 표현은 유기적입니다.
그리고 그 방법론과 결과물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풍성함을 함께 발견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리스도를 이 땅에 다시 드러내게 하려는 사람들의 공동체는 그리스도를 깊이 알게 됩니다.
신약성경은 다른 어떤 교회의 모습을 상상도 하지 못합니다.
에클레시아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내가 믿기로는, 어떤 사람들은 “유기적 교회” 라는 말을 가정집에서 모임을 갖는 그리스도인들(“가정교회”)과 동일시하며 잘못 사용하고 있습니다.
나는 교회의 순수한 유기적 표현과 가정교회 사이의 차이점들을 밝히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습니다.
이에 대해 몇가지로 정리하겠습니다 (아래는 물론 나 자신의 개인적인 확신입니다).
1. 나는 오늘날의 많은 “가정교회”를 전혀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중 많은 교회가 유기적인 것과는 거리가 한참 멉니다 (이 용어를 사용하는 나의 관점으로 볼 때).
그렇기 때문에, 나는 “가정교회”를 모델로 지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한번도 지지한 적이 없습니다.
집의 거실은 나의 열정이 아닙니다. 나의 경험과 내가 그동안 관찰한 바로는, 많은 가정교회에 내재하시는 주님에 의해 사는 법의 개념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에 사로잡혀 있지도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어떤 다른 “것” 또는 “그것” 뒤에 붙어있는 각주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현대 기독교 전반의 실태입니다 (통상적인 설교나 모임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많이 언급되는지를 살펴보십시오).
서로 함께 주 예수님을 추구하는 것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나는 지난 17년 동안 이것을 눈여겨 봤습니다.
감사한 것은 오늘날 제도권 교회 밖에 있는 그리스도인들 중에 에클레시아가 오직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분을 드러내는 것임을, 아울러 그것의 원동력과 추진력과 동기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이루는 것임을 이해하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늘어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의 필요에 중심을 두지 않고).
2. 나는 결코 “운동”을 시작하려는 욕구를 지지한 적이 없습니다.
교회사를 연구하는 학생의 한 사람으로서 볼 때 “운동을 하려는 사고방식”은 아주 흔한 일입니다.
다소 출신 바울은 운동을 시작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1세기의 초대 교회에 관해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서 볼 때 이것은 그의 레이더에 잡힌 적이 없습니다.
바울은 그의 전 생애에 걸쳐 13개 내지 14개의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것을 다시 읽어보시라.)
바울은 양보다 질에 훨씬 더 관심을 두었습니다. (금과 은과 귀한 보석으로 집을 짓는 것이 그의 관심사였습니다 – 고린도 전서 3장을 보십시오.)
내가 “운동”과 그 운동이 만들어낸 결과에 관해 할 얘기가 많지만, 그것은 유기적 교회 세우기에서 제법 많이 다루었습니다.
3. 유기적 교회 생활을 경험하기 위한 목표는 결코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것이 아니어야 합니다.
또한 그 목표는 세계 복음화나 교회의 재생산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그 목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의 성취입니다 – 예수님에 의한,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예수님을 향한 목표.
“그리스도의 충만함”이라는 탄탄한 기초 위에 세워진 목표.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라는 것은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것이나 세계 복음화나 교회의 재생산 같은 것들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영원한 목적의 진면목을 알고자 하면 영원에서 지상으로를 참조하십시오.)
이런 것들을 목표로 강조하는 사람들은 (종종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드와이트 L. 무디와 존 모트(YMCA와 에큐메니칼 운동의 중심 인물, 노벨 평화상 수상) 같은 인물들의 사고방식을 도입합니다.
나는 작년에 조지 폭스 신학대학원에서 말씀을 전할 때 이 사고방식을 집중적으로 거론했습니다. 내가 그것을 성경의 이야기와 합치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이유에 관심을 가지십시오.
4. 어떤 사람들은 운동을 시작하려고 노력하지만(이미 과거에 많은 사람이 그랬듯이) 오늘날의 가정교회나 simple church를 둘러싼 운동들은 주로 깊이가 없고 안정성도 희박합니다.
나의 이런 관점은 내가 직접 여행하면서 관찰한 것들과 이런 운동들에 관여한 사람들과의 많은 인터뷰를 기초로 한 것입니다.
예외적인 경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그렇지만 지금 8가지 특성을 가진 순수한 하나님의 역사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역사” 또는 “현상”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의 회복, 곧 영원에서 영원까지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의 회복에 중심을 두고 있습니다.
이것이 창세 전부터 하나님의 가슴을 고동치게 한 그것입니다.
5. 지금 선교적 교회 운동 안에 교회, 선교, 제자훈련 같은 주제들을 놓고 많은 혼란이 있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선교적 교회 운동 안에 서로 일치하지 않는 두개의 주요 기류가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에 더 큰 혼란을 야기합니다.
다음은 이전에 “유기적 교회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내가 답한 글입니다.
2 ping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