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의 기록을 볼 때 그 당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어렴풋이나마 이해한 사람은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베다니의 마리아 딱 한 사람입니다.
그녀의 행동을 제자들이 나무랄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를 암시해줍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요 12:7)
하지만 예수님이 돌아가신 직후에 드러내놓고 장례를 치른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 또한 예수님의 죽음을 달리 생각한 사람들임에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메시아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십자가에서 죽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그것도 율법에 의하면 나무에 달려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이 명백한데 그런 사람을 장례 치른다는 것은 제 정신으론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니고데모가 왕의 장례를 치르는 수준인 30 킬로그램에 해당하는 몰약과 침향을 가져왔고, 아리마대 요셉이 자기 또는 가족이 묻힐 새 무덤에 예수님을 모신 것을 보면, 그들은 제자들을 비롯한 예수님을 따르던 다른 사람들과는 달라도 한참 달랐습니다.
처음엔 그들도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다른 모든 유대인처럼 자기들이 바라던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를 통치할 다윗과 같은 왕을 기대하며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입니다.
단, 호기심에서 출발했고 유대인 최고 지도자회의(공회, 산헤드린)의 회원이라는 신분 때문에 뭇 사람들의 눈이 두려워 먼 발치에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하지만 사람들 몰래 예수님을 만나 상담을 하고 또 그분을 계속 지켜보면서 그들은 점점 자신들의 기대와는 다른 예수님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일찍이 예수님과의 첫 만남에서 니고데모가 예수님과 나눈 대화의 내용을 보면 감을 잡을 수 있습니다.
똑같은 “하나님의 나라” 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니고데모가 기대하는 것과는 달리 ‘위로부터 오는 나라이므로 위로부터 오는 생명이 있는 사람만 볼 수 있고 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 3:3, 5).
이런 생명을 예수님은 “영생”이라고 하셨습니다 (요 3:15).
요한복음의 저자는 요한복음 3:3과 3:5의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에서 “하나님의 나라” 라는 말을 딱 두번 언급하고는 이후로 요한복음 전체에서 단 한번도 이 표현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이 말을 의도적으로 피한 것입니다.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공관복음엔 도배되다시피 한 이 말을 요한복음의 저자는 어째서 기피한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 뿐만아니라 수십 년이 지난 요한복음 기록 당시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교회 안팎에서 자기들 식의 “하나님의 나라”를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기대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둘 중 하나입니다.
메시아 왕이 이 땅에 세워서 통치하는 팔자 고쳐주는 나라, 아니면 죽은 후에 가서 팔자 고치도록 황금 아스팔트가 좍 깔린 저기 어딘가에 있는 하늘나라 낙원의 맨션.
요한복음의 저자 역시 예수님의 최 측근으로 따라다녔어도 예수님이 이 땅에 계셨을 때는 자기가 바라던 하나님의 나라 그 이상은 알지 못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 승천, 성령강림 후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수십년 동안 보고 경험하며서 비로소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하나님의 나라의 진면목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도 이전의 자기처럼 오해해서 엉뚱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고 있는 사람들에게 바로 가르쳐주려고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나라” 라는 표현을 피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라는 표현 대신 그가 도배를 한 말은 “생명”과 “영생” 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 라는 말과 함께 끊임없이 사용하신 표현일 텐데, 요한복음의 저자는 독자들의 오해를 해소해주려고 이 표현들만 사용했습니다.
“생명”이나 “영생”은 곧 “하나님의 생명”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영원하기 때문에 이 생명을 가진 사람들은 이 땅에서나 이 땅을 떠나거나 항상 하나님과 함께 연합하여 하나를 이루고 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셨지만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셨기 때문에 이 땅에 오시기 전과 똑같이 항상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사셨던 것처럼, 이 생명이 있는 사람들도 이 땅에서부터 영원토록 아버지와 예수님과 연합하여 하나를 이루며 살게 됩니다.
이것을 성경은 “영생” 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요 이 복음의 내용이 “에클레시아(교회)” 인데, 이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요한복음을 기록할 당시의 교회들도, 그리고 오늘날의 제도권 기독교도 엉뚱한 “하나님의 나라”를 기대하며 애먼 곳에서 헤매는 것입니다.
이단과 사이비 집단은 두 말하면 잔소리고…
물론 요즈음은 “영생” 이라는 말도 마르고 닳도록 사용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영생”의 의미와는 천지 차이입니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이런 이치를 알게 하려고 독자들에게 진부할 정도로 끈질기게 설명을 합니다.
저도 그가 기록한 것 다는 아니지만 진부할 정도로 아래에 인용하겠습니다.
먼저 요한복음의 저자가 이 땅에 계셨던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와의 하나된 관계를 표현한 구절들입니다.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 (요 5:19 – 20)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아버지 곧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요 8:16)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요 8:28 – 29)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요 10:37 – 38)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요 14:9 – 10)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요 16:32)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요 17:5)
그 다음 예수님의 제자들(교회)과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가 연합하여 하나를 이루는 것에 관한 구절들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요 6:56 – 57)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요 14:2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요 14:23)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요 17:1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요 17:21)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요 17:23 – 24)
이것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목적, 곧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부터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목적입니다.
바울의 표현대로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을 말합니다.
물론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십자가, 부활, 승천, 성령강림 이후 교회가 세워지기 전까지는 이 목적을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자기들이 바라던 메시아 왕국과는 차원이 다르고, 또 예수님이 죽으신 것에는 분명 그 하나님의 나라와 연관된 무슨 뜻이 있을거라고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된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데 모두 다 숨 죽이고 숨어 있는 때에 용감하게 나서서 예수님을 왕 수준으로 장사한 것입니다.
진정 돋보이는 하나님의 VIP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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