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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0

호기심에서 VIP로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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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평소에 예수님이 살아계셨을 때 당당하게 제자임을 밝히지 않고, 돌아가신 다음 나타나서 장례 치른 게 뭐 그리 대단하냐고요?

그들이 예수님의 장례식에 초대받은 유일한 하나님의 VIP 두 사람이라고요?

 

언뜻 보면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에야 나타난 것이 비겁한 행동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 때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롯해 그분을 따르던 모든 사람이 도망가서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숨어 있을 때입니다.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요 20:19)

제자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사흘 째 되는 날까지도 잡혀 끌려갈까 두려워서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갈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두려움 뿐이었겠습니까?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믿고 그분의 왕국인 하나님의 나라에서 팔자 고칠 것을 꿈꾸며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따라왔는데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버리니 그 허탈감과 실망감이 오죽했겠습니까?

그들은 이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 상태에 목숨마저 위태로운 신세였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유대인 최고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고 싶었다면 얼마든지 성 밖으로 끌고 가서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평소에도 심심하면 예수님을 돌로 치려 한 것을 봐도 (요 8:59, 10:31), 간음한 여자를 돌로 쳐 죽이려고 한 것을 봐도 (요 8:1 – 11),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인 것만 봐도 (행 7:54 – 60) 이를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자기네 식으로 예수님을 죽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로마제국에 반역을 꾀하는 정치범으로 몰아 십자가에 못박혀 죽이려는 꼼수를 부렸습니다.

아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면 그 후에 아무도 더는 예수님을 따를 수 없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신 21:23)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

 

예수님이 나무에 달리기만 하면 예수님을 따르던 수많은 사람 위에 찬물을 끼얹고 하루 아침에 그들을 돌아서게 할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을 것입니다.

율법을 중시하는 유대인들 중 여호와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사람을 따를 무모한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인 줄 알았더니 실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형편없는 친구구만… 쯧쯧.’

 

따라서 최 측근 제자들은 물론 유대인 모두가 십자가 나무 위에서 죽은 예수님을 기피하고 몸을 사려야만 할 때 대놓고 장례를 치른 사람들이야말로 진정 간 큰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토록 기다려왔던 메시아가 예수가 아닐까, 그가 예루살렘에 입성하면 다윗의 왕국을 회복하고 유토피아가 펼쳐지지 않을까…’

이런 기대가 물거품이 되었으니 제 정신 가진 사람이라면 숨어서나마 제자였던 게 들통날까봐 몸을 사리고 안면몰수 하는 게 지극히 정상입니다. 그것도 ‘지체 높으신 분들'(공회원들)이면 더욱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드라마로 치면 완벽한 반전을 연출한 희귀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뭐를 믿고 이런 간 큰 행동을 한 것일까요?

물론 우리가 성경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가 쉽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짐작은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요 19:39)

 

여기서 “백 리트라”는 30 킬로그램이나 나가는 무게입니다.

이것은 보통 왕의 장례식에나 사용되는 양인데, 니고데모가 그렇게 많은 몰약과 침향을 갖고 왔다는 것은 곧 ‘왕의 장례식’을 치렀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은 죄수에게 왕 수준의 장례를 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니고데모에게는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왕이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 등장하는, 그가 일찍이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얘기를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없습니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2:23 – 25에서 ‘예수님은 표적을 보고 예수를 믿은 사람을 믿지 않았다’고 하면서 그런 사람의 대표적인 예로 니고데모를 들었습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요 3:2)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님이 행하신 초자연적인 일들을 ‘기적’ 대신 ‘표적(sign)’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것들은 다 ‘싸인(sign)’ 또는 ‘표지판’ 이라는 것입니다.

 

어디를 운전하고 갈 때 신호대기에서 파란불이 켜졌다고 고마워서 차 밖으로 나와 신호등을 끌어안고 뽀뽀해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건 안내해주는 싸인이기 때문입니다.

 

이정표

 

멀리 여행할 때 이정표가 정확히 방향과 거리를 알려줬다고 차에서 내려 그 이정표에게 감사하고 동네방네 이정표를 경험한 간증을 하고 돌아다니는 사람은 없습니다.

길을 안내해주는 표지판이기 때문입니다.

싸인이나 표지판은 그것들이 안내하고자 하는 목적을 성취하면 그만입니다.

 

예수님의 표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표지판이므로 그것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가 그분의 진면목을 알고 그 표적은 잊어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표적에 집중하고 예수님을 엉뚱하게 이해합니다.

속물근성이 발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표적을 보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믿지 않으신 것이고,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 또한 믿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들을 믿었다가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신 목적과는 동떨어지 길을 가실 게 뻔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니고데모의 수준이었습니다.

 

이런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 사람이 “위로부터 나지 아니하면”(개역성경의 “거듭나지 아니하면” 이라는 번역은 문제가 있음)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셨고 (요 3:3), 또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요 3:5).

 

유대인으로서, 그것도 바리새인이요 랍비로서 니고데모는 평생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며 그 나라의 왕으로 오시는 메시아를 고대하고 살아왔을 것이고,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도 이 하나님의 나라에 온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예루살렘에 다시 회복될 다윗 왕과 같은 메시아가 통치할 나라를 꿈꾸고 예수님께서 혹시 그 메시아가 아닐까 궁금하던 차에 그분이 표적을 많이 행하신다는 뉴스를 듣고 상담 요청을 한 것입니다.

 

이것을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 나라가 아닌 위로부터 오는 나라이기 때문에 위로부터 오는 ‘생명’이 있어야(“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야)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임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물론 그날 저녁엔 니고데모가 무슨 말인지 몰라 횡설수설하다가 돌아갔겠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가 자신이 기대하던 메시아 왕국과는 거리가 있음을 날이 갈수록 점점 더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왕이시긴 한데 예루살렘에 세워지는 이 세상 나라의 왕이 아니고, 그분이 왕으로서 통치하는 나라는 전혀 다른 세상임을 어렴풋이 알게 된 것 같습니다.

 

결국 이 “하나님의 나라”를 제대로 파악하게 된 것이 니고데모로 하여금 예수님의 장례를 치른 하나님의 VIP가 되게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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