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진 에드워즈의 책 [유기적 성경공부]와 [가정교회 팡세]를 번역한 박인천 형제님이 가정교회(유기적교회)에 관해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대답하기 쉽게 쓴 글입니다. 많이 퍼가서 사용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가정교회(유기적교회)란 무엇인가?
질문:
가정교회(유기적교회)란 어떤 교회를 말하나요? 단순히 모임의 장소를 말하는 것인지, 새로운 교단이나 종파인지, 아니면 기존 제도권 교회 안의 소 모임(small group)의 또 다른 이름인지 그 개념이나 정체가 선명히 와 닿지 않습니다.
답:
사람이나 사물의 ‘이름’이 그 스스로 결정한 것이기보다 대개 외부에서 부여된 것임을 상기해보는 것이 이 질문의 대답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우리 자신의 이름도 스스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 부모나 주변 어른들로부터 부여받았고, 한 건물의 이름 역시 그 건물의 특징을 따라 외부에서 붙여주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어떤 종파나 종교 모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침례교회(Baptist Church)는 회심한 신자들이 강이나 바다에 입수하여 침례(baptism)받기 때문에 외부에서 붙여준 이름이고, 감리교회(Methodist Church) 역시 그 첫 모임을 시작한 옥스포드대학교 내 몇몇 학생들의 규칙주의(methodism)를 빗대어 주변에서 붙여준 이름입니다. 가정교회(house church)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제도권 교회들이 십자가 첨탑이 있는 예배당이나 건물에서 모이는 것과는 다르게 가정집(house)에서 모이는 경우가 많다 보니 가정교회라는 이름으로 불릴 뿐 우리 스스로 가정교회라는 이름으로 우리 모임을 결정지은 적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를 유기적 교회(organic church) 혹은 관계적 교회(relational church)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지만, 이 또한 1인 성직자(담임 목사)에 의해 주도되는 기존 교회와 달리 형제,자매간의 관계와 기능을 중시하는 데서 붙여진 이름일 뿐, 가정교회의 정체성을 온전히 대변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가정교회가 어떤 교회이다’를 논하기에 앞서 ‘무엇이 가정교회가 아닌지’부터 먼저 논해야 가정교회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첫째, 가정교회는 교회 안의 소 모임이 아닙니다.
제도권 교회 안에서조차 기존의 소 모임(small group, 구역, 순, 속회 등)을 강화하기 위한 전략으로 친교 또는 전도를 강조하는 가정 모임을 강조하며 ‘셀 모임’, ‘목장’, 또는 ‘가정교회’ 라는 이름을 붙여 가정교회의 모임 방식을 채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시도는 우리가 살아가는 가정교회의 정체성이나 그 지향점과 전혀 궤를 달리하고 있습니다. 보관하기에 너무 커서 조각낸 수박과 한 알 한 알 그 자체가 완전한 열매인 포도송이가 어떻게 다른지를 연상해보십시오. 거대한 조직을 효과적으로 관리 감독하기 위해 나누어놓은 소 모임과 모임 그 자체가 하나의 온전한 교회인 가정교회는 전혀 그 성격을 달리합니다.
둘째, 가정교회는 단순히 모임의 장소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가정집(house)에서 모이지만 제도권 교회의 주일 예배와 조직과 기타 제도를 그대로 옮겨놓는다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의 성직자(혹은 성직자 역할을 대신하는 사람, 그가 장로든, 리더든, 아니면 다른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가 모임을 주도하고 나머지는 수동적이라면 가정집에서 모일지라도 그것은 전혀 가정교회라고 볼 수 없습니다. 제도권 교회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가지고 가정집에서 모이는 것은 우리가 말하는 가정교회가 아닙니다.
셋째, 가정교회는 교단, 교파, 혹은 종파 또는 선교회나 기독교 단체를 지향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초교파 교회나 비영리 종교조직도 아닙니다. 물론 각 지역의 가정교회가 서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교제와 친교를 나누기 때문에, 가정교회 밖에서 보면 조직의 성격을 띤 것으로 비추어질 수 있겠으나 우리는 그것에 대해 예민한 경계심을 거두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정교회는 무엇입니까?
첫째, 가정교회는 에클레시아(교회)를 그녀(her)로 보며 그녀의 기능을 최고의 가치로 삼습니다.
모두가 알다시피 교회는 건물(it)이 아닙니다. 신약성경이 선명히 밝히는 바 교회는 예수님의 신부 곧 그녀(her)라는 인격체입니다. 무생물인 그것(it) 안에는 아무런 생명도 없고 그 스스로 어떤 기능도 자발적으로 되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bride)이기에 살아있는 생명체이고 생명체 특유의 ‘기능(function)’을 발휘합니다. 그러니 교회를 ‘그녀(her)’라 부르고 그렇게 대하는 것이 맞습니다.
바울이 이방인 도시에 들어가 한 가정집에서 교회를 세웠을 때 그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바로 이 아름다운 소녀(girl)인 에클레시아였습니다. 바울은 그 에클레시아와 평균 4-6개월 정도 함께 생활한 후 홀연히 그곳을 떠나 1년에서 2년 안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가 떠나고 나면 홀로 남겨진 그녀(에클레시아)는 그 열악한 환경 속에서 생명체 특유의 기능을 발휘하며 생존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습니까? 남겨진 사람들은 98%가 문맹이고, 평균 수명이 40살 안팎의 주로 극빈층 아니면 노예들로서 대부분 10대 후반이면 영양실조로 치아가 녹아버리는 사람들이 상당수였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지도자도, 제도도, 성경 한 권도 없는 환경에서 스스로 교회를 이끌어간다는 말입니까? 그 대답은 간단합니다. ‘생명체’이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살아있는 생명체는 아무리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그 특유의 생명을 유지하고 번식하기 위해 자신의 기능을 발휘해나갑니다.
마찬가지로, 홀로 남겨진 이 에클레시아라는 새로운 생명체 역시 그녀의 생존과 운명, 그리고 존재 방식을 그렇게 스스로 찾아나갔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그리스도를 나누며, 오늘 우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사랑과 헌신으로 그녀는 기능하기 시작했습니다. 성직자(목사, 사제, 전도사)가 없이는 주일 예배조차 드리지 못하는 오늘날의 현대 교회와 이 생명체, 이 처녀, 이 에클레시아를 비교해보십시오. 유전자(DNA)가 다르고, 그 생존 방식이 다릅니다. 이것은 결코 문화와 시대의 차이가 아닙니다. 유전자의 문제입니다.
그렇습니다. 가정교회는 그 안에 여타의 성직자를 두지 않습니다. 그것은 단지 성직에 대한 부작용이나 거부감, 혹은 적대감 때문이 아닙니다. 그 성직이 에클레시아의 기능을 마비시키며 명확히 비성경적이기 때문입니다. 가정교회는 단순히 그 모임 장소가 가정집임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모임에 참석한 지체들이 ‘몸’으로 기능할 수 있다면 그 모임의 장소는 가정집이든, 사무실이든, 공원이든, 들판이든, 거리든 결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둘째, 가정교회는 그분(him)에 대한 결핍을 분명히 인지하며 인정합니다.
일반적으로 교회 안에서 우리가 나누는 대화를 가만히 들어보십시오. 누구의 입에서도 주님, 그분(him)에 대한 그리움이나 결핍이 거의 흘러나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전도에 대해 고민합니다. 그러나 전도는 그분(him)이 아니라 그것(it)입니다. 봉사에 대해 의논합니다. 그러나 봉사 역시 그분(him)이 아니라 그것(it)입니다. 교회당 건축을 계획합니다. 하지만 그것도 그분(him)이 아니라 그것(it)입니다. 성경공부, 건강한 프로그램, 설교, 헌신, 제자도, 훈련, 교제, 사랑, 믿음… 등이 중요하지만 다 그분(him)이 아니라 그것(it)입니다. 심지어 성경조차도 그분(him)이 아니라 그것(it)입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것(it)이 아니라 그분(him)입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그것(it)이 결핍된 것이 아니라 그분(him)이 결핍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그분(him)이 우리 가운데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턱없이 부족합니다. 높은 산에도 산소는 존재합니다. 그러나 턱없이 부족하기에 숨이 가빠지며 고산병이 생기는 것처럼 우리 안에도 그분(him)이 부족해서 우리의 영혼이 피폐해졌습니다. 거의 영적 현기증으로 쓰러질 지경입니다. 우리는 이런 현실을 직시하며 솔직하게 ‘그렇다’ 라고 인정합니다. 그래서 뻔한 구호를 외친다고 핀잔받을지라도 결코 이를 의식하지 않고 초지일관 그분(him)을 구합니다. 에클레시아인 그녀(her)와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him)의 깊고 온전하고 풍부한 만남이 우리의 비전이며 가치이며 모든 것입니다.
셋째, 가정교회는 ‘몸’으로서의 ‘교회생활’을 지향하는 교회입니다.
교회는 ‘다녀오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에 ‘다닌다’는 말 안에는 내 실제 삶은 ‘여기’인데 내 실제 삶과 분리된 ‘저곳’에 잠시 들렀다가 오는 개념이 녹아있습니다. 즉, 주일 예배에 ‘다녀오는 교회’는 그 실제 삶에 전혀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1세기 그리스도인들은 일주일에 한 번, 혹은 두세 번, 실제 삶과 분리된 어떤 건물에 ‘다녀오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행위는 그리스 신전에 나아가 이방신을 섬기는 이교도들의 종교 관행이었습니다. 이 땅의 첫 그리스도인들은 ‘함께 살아가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존재했습니다.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경험과 상처, 인격과 상황, 장점과 단점, 재능과 은사, 결핍과 풍요가 상호 교차하고 충돌하며 깨어지고 다듬어짐은 물론, 영적 화학작용을 거쳐 치유와 회복을 이끌어내고 마침내 그것이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공동체적 삶으로 구현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교회생활’ 이라는 말에 담긴 실제 의미입니다. 이것은 결코 주일 예배나 다른 교회 프로그램으로 대체될 수 없는 가치입니다. 신약성경은, 특히 서신서는 한 개인의 영적 경건을 돕기 위해 주어진 교훈의 말씀이 아닙니다. ‘몸’으로 살아갔던 ‘공동체’가 실제로 씨름하며 풀어나갔던 현실적인 사건들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가정교회는 이 몸으로서의 ‘교회생활’을 추구합니다. 물론 이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만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가치이며 비전인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께 부름을 받은 모든 이들에게 운명처럼 주어진 의무이자 특권입니다.
넷째, 가정교회는 그리스도의 계시를 그 중심에 둡니다.
사자의 삶을 사자가 살아가고, 독수리의 삶을 독수리가 살아갑니다. 물고기의 삶을 물고기가 살아갑니다. 민들레의 삶을 민들레가 살고, 백합화의 삶을 백합화가 삽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누가 살아가는 삶이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은 당연히 ‘그리스도’께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주어진 삶도 아닐뿐더러 우리가 살아갈 수도 없는 삶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서 영위하시던 바로 그 삶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모시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분이 우리 ‘안에’ 계시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분이 우리 ‘안에서’ 그분의 삶을 사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분을 우리 안에 깊이, 가능한 한 깊이 모셔들이는 일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안에 아버지가… 아버지 안에 내가, 내 안에 너희가… 너희 안에 내가…”를 그토록 자주 말씀하시고 또 기도하셨던 이유가 그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주님과의 ‘교제’를 통해서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현대 교회가 강조하고 있는 모든 관행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영역입니다. 가정교회가 중시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바로 이 교제에서 흘러나오는 그분의 은혜입니다.
남녀 간의 교제를 잠시 연상해보십시오. 교제가 깊어지면 그동안 몰랐던 그(혹은 그녀)가 보이기 시작하고 그(혹은 그녀)가 누구인지를 새롭게 알아갑니다. 그(혹은 그녀)에 대한 새로운 지식과 깨달음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두 가지의 지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교제가 깊어지다 보니 ‘내 편에서’ 알게 된 지식이 있고, 나는 미처 알아채지 못했는데 그(혹은 그녀)가 먼저 털어놓음으로써 알게 된 그(혹은 그녀)에 대한 지식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와 그분과의 ‘교제’가 실제로 깊어지다 보면 그동안 우리가 몰랐던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우리 편에서’ 새롭게 알게 된 주님이 아니라, 그분이 ‘먼저’ 우리에게 열어주시는 그분 자신과 그분의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계시’라고 부릅니다. 교회엔 그 계시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바로 그 ‘계시’가 가정교회의 생명이 됩니다. 그렇다면 그 계시가 주님으로부터 흘러온 것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교회라는 ‘몸’이 그것을 분별할 것입니다. 가정교회는 주님과의 교제와 그 교제에서 흘러나오는 그 계시를 ‘몸’의 생명으로 삼습니다.
다섯째, 가정교회는 그 모임에 있어 격식 없고, 형식 없는 자발성을 취합니다.
세상 어느 교회를 가든 주일 예배는 동일합니다. 일요일이 되면 깨끗한 옷을 입고 십자가 첨탑이 있는 예배당 또는 건물로 들어가 찬송-기도-성가대-설교-헌금-축도 등의 순서가 진행되는 1시간 남짓 동안 묵묵히 의자에 앉아 앞을 바라보다가 돌아오는 이 의식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심지어 아프리카 오지나 에스키모들에게도 차이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미 ‘의식과 ‘규칙(율법)’이 기독교 신앙으로 대체되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종교가 공유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제사 드리는 장소, 제사장, 제사 의복, 제사 용어, 제사 의식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을 깨뜨리시며 예수님께서 이 땅에 가지고 오신 유일한 영적 생명체가 에클레시아(교회)인데 지난 1700년 동안 이상 우리는 또다시 예배당, 성직자, 조직, 성가대, 그들이 입는 가운, 주보에 인쇄된 예배 순서, 평상시 쓰지 않던 용어와 말투 및 제도로 회귀한 것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와 그리스 지역, 그리고 에베소와 로마 등에 세운 ‘이방인 교회’를 상기해보십시오 (우리도 이방인의 후예이기 때문입니다). 대다수가 하층민과 노예였던 그들은 일요일 오전이 아니라 거의 매일 일과가 끝난 후 한 형제(자매)의 집에 모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날 자신이 경험한 주님을 서로에게 나누다가, 주인에게 매맞아 늦게 참석한 형제의 상처를 부여잡고 함께 기도하고, 기도하다가 찬양하고, 찬양하다가 아무것도 아닌 일에 방이 떠나갈 듯 웃음을 터뜨리고, 한 자매가 찬양을 지은 것을 부르면 모두가 따라 부르고, 울다가 웃고, 웃다가 환호성을 지르고… 그렇게 밤 늦게까지 그들의 교제를 이어갔을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격식 없고, 형식 없는 자발적인 모임으로 돌아가려는 것입니다. 지역 교회는 그들만의 독특한 표현으로 그리스도를 드러낼 필요가 있습니다.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과연 오늘날 1년의 52주 내내 전 세계 어디를 가든 판에 박힌 듯 똑같이 진행되는 주일 예배라는 의식을 좋아하실까요? 그것은 결코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신 적도 없고 성경적인 의식도 아닌 단지 로마 카톨릭을 거쳐 종교개혁의 산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개혁자들이 비성경적인 로마 카톨릭의 미사를 개혁했다며 성찬식을 빼고 설교를 집어넣은 채 지난 500년 동안 나무껍질처럼 굳어져 온 안타까운 관행일 뿐 성경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의식입니다.
여섯째, 가정교회는 기독교인들의 기억에서 사라진 한 인물, 곧 순회사역자를 소환합니다.
순회사역자(교회개척자)가 누구인지를 논하기에 앞서, 우리의 틀에 박힌 ‘사고방식’의 위력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신약성경을 읽으며 그 안에서 ‘교황’을 찾아낼 수 있을까요?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 그럴까요? 신약성경엔 교황이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교도들은 전혀 어려움 없이 신약성경 매 페이지에서 교황을 찾아낼 수 있다고 합니다. 반대로 그들은 개신교회 목사들을 성경 속에서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신약성경엔 오늘날의 그 목사들이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참고로 ‘목사’ 라는 용어 자체는 성경에서 단 한 번 언급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개신교인들 역시 신약성경 어디에서나 그들의 목사를 찾아냅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베드로나 바울이나 디모데를 오늘날의 목사로 둔갑시키기도 하고, 장로로도 만들 수 있으며, 때로는 선교사로, 때로는 복음 전도자의 옷을 입힐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고방식’이 가진 능력입니다.
그러나 열두 제자와 바울이나 바나바 등, 또한 바울이 에베소에서 길러낸 제자들(디모데, 디도, 가이오, 아리스다고, 세군도, 소바더, 드로비모, 두기고, 에바브라 등)은 오늘날의 목사도, 사제도, 장로도 아닌 순회사역자(또는 교회개척자)였습니다. 열두 제자는 초기 8년 동안 예루살렘교회 안에 머무른 후 사마리아, 갈릴리, 유대에 퍼진 가정교회들을 돌보는 한편, 다른 여러지역에 에클레시아를 세워나갔던 순회사역자들(교회개척자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지역의 네 교회와 그리스지역의 네 교회 등을 세우면서 그 각각의 교회에 보통 3개월에서 6개월, 또는 1년 반 정도를 지내면서 교회를 세우고 홀연히 그곳을 떠났던 순회사역자였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바울이 에베소에서 훈련했던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들 중 그 누구도 오늘날 우리가 아는 현대 교회의 목사처럼 한 지역교회의 담임자로 머물며 주일 예배 때마다 설교를 하고 CEO처럼 교회를 총괄했던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1세기 때 간혹 장로들이 세워진 교회가 있었지만 그렇게 세워진 장로 역시도 이 순회사역자들의 손에 의해 세워진 개 교회의 지체들로서 그 교회에서 존경받는 신앙의 연장자였지 오늘날의 목사가 아니었습니다. (오늘날엔 지역교회의 담임목사나 장로회에 의해 장로들이 세워지며, 그렇게 세워진 장로들은 무소불위의 권세로 교회를 주도해나가지만 1세기의 장로들은 신앙의 연장자로서 하나님 가족 안의 동생들을 사랑하고 돌보던 형이나 오빠, 또는 누나나 언니 같은 역할이었습니다.) 1세기의 교회 안에서는 오직 이 순회사역자들과 한 몸으로 교회를 세워나갔던 지체들, 이 두 부류의 그리스도인들만 존재했을 뿐입니다.
우리는 다시 이 순회사역자의 자리를 준비해야 하고 그를 소환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두려운 일이며 많은 대가가 요구되지만 가정교회의 사활이 여기에 걸려있다고 할 만큼 중차대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일곱째, 가정교회는 신약성경을 한 편의 ‘이야기’로 이해합니다.
어떤 책을 읽든지 그 책의 ‘스토리’가 마음에 남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스토리에 따라 펼쳐지는 ‘그림’도 있습니다. ‘이야기’는 반드시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한 편의 영화에도, TV 드라마에도, 어느 노부부의 인생에도, 어린 시절 할머니가 들려주셨던 동화 한 편에도 스토리가 있고, 오랜 시간이 흘러도 그 스토리가 마음에 남아 거기에서 연유하는 그림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만큼은 수십 번 반복해서 읽고, 수십 년 설교를 들었어도 그 줄거리가 떠오르지 않습니다. 성경 전체를 ‘한편의 이야기’로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 한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만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스토리가 없으면 떠오르는 이미지도 없습니다. ‘이야기’가 없으니 그 이야기가 불러오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것은 당연합니다. 결과적으로 우리 안에는 아예 처음 교회의 ‘모델’이 부재합니다. 교회 회복을 말하지만 돌아갈 교회가 없습니다.
우리 안에 신약성경의 ‘이야기’가 부재하고 그 결과 우리가 돌아갈 처음 교회의 주소를 상실한 데에는 다음 세 가지 정도의 원인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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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이 원래 기록된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의 3분의 2 정도를 차지하는 바울 서신은 그 배경이나 연대순, 맥락과는 전혀 상관없이 뒤범벅되어 있습니다. 로마서는 바울의 여섯 번째 편지로써 57-58년 경에 기록되었지만 서신서 중 첫 번째 자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다음 만나게 되는 고린도 전,후서는 로마서 이전인 55-57년 사이에 기록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오는 갈라디아서는 고린도 전,후서가 쓰이기 약 5-7년 전에 작성된 편지입니다. 즉, 성경에 배열된 순서대로 바울 서신을 읽다 보면 우리는 거꾸로 성경을 읽는 셈입니다. 그 다음에 펼쳐지는 편지가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인데 이 편지들은 로마서가 기록된지 5년쯤 후인 62년 경에 작성되었는데, 느닷없이 51-52년 경에 기록된 데살로니가 전,후서가 그 뒤에 등장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이 각각의 편지들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이런 연결구조에서 신약성경이 한 편의 이야기로 다가오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지난 2천 년 가까이 우리가 신약성경을 읽어온 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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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신약성경의 이야기를 상실한 또 하나의 이유는 구절 중심으로 성경을 알아왔기 때문입니다. 설교나 성경공부가 짧은 본문 또는 몇 구절을 중심으로 되어지고, 심지어 신학교에서는 성경의 한 장이나 한 구절을 가지고 한 학기를 연구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런 연구를 수준 높은 학문으로 여기는 풍토마저 존재해왔습니다. 그 결과 신약성경이 빚어내는 ‘한편의 이야기’나 그 이야기가 그려내는 ‘모델’은 도무지 존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저 각 사람의 마음에 와 닿는 말씀들을 이곳 저곳에서 가위질하고 풀칠하여 맥락과 전혀 상관없이 ‘은혜로운 말씀’들을 창조해왔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뽑아낸 그 구절들의 신학적 차이 때문에 기독교 역사는 피로 물들어왔습니다. 우리는 만 가지 주장과 이론에 만 가지 성경구절들을 끌어올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이야기’를 상실한 우리의 비극적인 역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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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신약성경을 ‘한편의 이야기’로 소유하지 못하고 그 이야기가 그려내는 ‘모델’을 상실한 데에는 ‘개인 경건과 교훈’의 말씀으로 신약성경을 적용해온 까닭도 있습니다. 신약성경, 특히 서신서는 바로 ‘한 몸’을 이룬 교회 공동체, 즉 ‘에클레시아’에 보내진 편지들이건만 우리는 이 편지들을 개인의 경건 생활이나 도덕 윤리적인 교훈을 위해 지침서 격으로 적용해왔던 것입니다. 그러니 말씀이 응하지도 않을뿐더러 그 속에서 한편의 이야기가 걸러질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폐단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신약성경의 ‘이야기’를 되찾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가정교회는 제 3의 흐름에 속한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본래 기독교 역사엔 초기의 교회 이후에 등장한 로마 카톨릭(Roman Catholic)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종교적 흐름만 존재했었습니다. 그러다가 1500년 대 중반에서야 개신교(protestant)라는 또 하나의 흐름이 형성되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 두 줄기의 흐름뿐일까요? 기독교 역사에 이 두 종교적 흐름 이외에 제 3의 흐름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주류에 들지 못했고 우리가 그것을 하나의 흐름으로 인지하지 못했을 뿐, 분명 또 한 줄기의 흐름이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다음에 나오는 사람들의 이름을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바울파, 왈도파, 후스파, 알비파, 위클리프, 재침례교도, 틴데일, 롤라드파, 모라비안, 진젠도르프, 프렘 프레담… 이 사람들은 그들의 시대에 한 점으로 살다 사라졌지만 이들을 하나로 이으면 느닷없이 시냇물들이 합쳐져 거룩한 강물이 되어 우리를 향해 흘러드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가정교회는 이들 중의 어느 한 종파나 계파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습니다. 이 거룩한 흐름을 따라 우리 시대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이 가정교회(유기적교회)라는 깃발 아래 모였을 뿐입니다. 위에 호명한 이들은 모두 제도권 교회 밖에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고백하는 바, 우리는 제도권 교회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데에 어떤 관심도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부르심에 충실할 따름입니다. 다만 제도권 교회 ‘안에서는’ 이 부르심에 반응할 어떤 길도 존재치 않음을 지난 2천 년의 기독교 역사가 이미 증언했기에 우리는 제도권 교회를 떠났노라고 고백하며 묵묵히 이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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