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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09

날아가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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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제가 미국에 온 지 42년이 되는 날입니다.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살에 이민 와서 환갑을 넘겨 미국에 살고 있으니 제 인생의 3분의 2 이상을 미국에서 산 것입니다.

 

저는 아직도 1974년 3월 9일 한국을 떠나 미국에 오던 때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김포공항을 떠나 일본 동경 하네다 공항에서 비행기를 갈아 타고, 하와이 호놀룰루 공항에 내려 미국 입국 심사를 받은 후, 다시 비행기를 타고 미국 로스 앤젤레스로 가는 여정이었습니다.

 

제가 한국을 떠날 때는 대한민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북한보다 더 낮을 정도로 가난했고 인프라도 잘 갖춰져있지 않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당시 유일한 국제공항이었던 김포공항은 건물만 달랑 하나에 Jetway도 없어 탑승할 때 건물 밖으로 나와서 멀리 대기하고 있던 비행기까지 걸어가야 했고, 환송하러온 사람들은 건물 2층의 베란다 격인 지붕도 없는 송영대에 서서 비행기로 걸어가는 가족과 친지들을 향해 목을 빼고 손을 흔들며 흐느끼기도 하고, “잘 가라”고 목청 높여 외치던 시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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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서울 도심인 종로나 명동에서 김포공항으로 가는 길이 신촌과 합정동을 거쳐 제 2 한강교(지금의 양화대교)를 건너 우회전해서 논밭 사이로 가는 도로 하나인 셈이어서, 이민 길에 오른 여덟 식구 중 공항에 먼저 도착한 제 1진이 주민등록증을 경복궁 앞 중앙청의 법무부에 반납해야 비행기를 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부랴부랴 택시를 잡아 타고 반대쪽에서 오는 택시를 유심히 살펴 제 2 한강교 직전에서 제 2진을 포착하여 작전 완료할 수 있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요즈음 같이 발달되어 복잡한 서울에서는 말도 안되는 불가능한 작전이고, 또 스마트폰으로 연락하면 되는 간단한 일인데 발전되기 전인 그때는 그런 방법이 통했습니다.

 

미국에 이민 가면 다시는 볼 기회가 없을 가능성이 농후했던 시절이라서 전국에 흩어져 있던 친척과 친지들 수십 명이 하루 전에 와서 우리 가족과 함께 밤을 지새며 이별의 아쉬움을 나눴던 기억이 납니다.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애국자로는 부족하여 거의 국수주의자에 가까웠던 제가 ‘전가족 이민’ 이라는 족쇄 때문에 할 수 없이 이민 길에 올랐기 때문에, 친구들 20여 명이 환송 차 김포공항에 와서 태극기를 선물하고 공항 로비에서 헹가래를 쳐주었던 기억도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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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일본 하네다 공항에서 미국행 비행기로 갈아타기 전, 원수 같은 일본 땅에 발을 디디고 있다고 생각하니 뭔가 속에서 메스꺼운 느낌이 올라와서, 양복 안 주머니에 고이 간직한 친구들에게 받은 태극기를  꺼내 흔들어댔다가 가족들에 “미쳤냐?”는 소리를 듣고 제지를 당한 기억도 심심하면 떠오릅니다.

난생 처음 타는 비행기라서 도착할 때까지 내내 비행기 멀미로 고생했던 일, 비행기 승무원이 이어폰을 나눠주길래 달라고 손짓 했다가 “Two Dollars” 라며 거금(맥도날드의 빅맥이 50 Cents 하던 시절이므로)을 요구하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거절했던 일, 미국 가면 귀한 것이라고 고추장을 플라스틱 석유통에 잔뜩 담아 들고 가다가 미국 입국할 때 짐 검사를 하던 하와이 호놀룰루 공항 세관원의 물음에 얼떨결에 “Pepper Ketchup” 이라고 대답했던 일도 기억납니다.

이 모든 게 42년 전의 일이니 지금 생각하면 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미국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이민 와서 서부인 California의 Los Angeles와 San Francisco 지역, 동부의 Boston과 현재 살고 있는 Washington 지역, 중북부에 있는 Chicago와 Ohio의 Columbus , 그리고 남부에 있는 Florida의 Jacksonville에도 살았으니 미국의 동서남북에 있는 대도시들을 두루 거치며 골고루 산 셈입니다.

그동안 몇 번이나 이사했는지 세어보니 42년 동안 무려 31번이나 이삿짐을 싸고 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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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미국에서 42년을 살아오는 동안, 얼마 전 이 블로그에 ’40년 동안 단 한 번도 잘못하신 적이 없는 주님’ 이라는 제목으로 쓴 글에서도 밝혔듯이, 대학시절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신 이후 지난 40년 동안 주 안에서 살아왔고, 특히 지난 15년은 이전에 미처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목적을 알고 이것이 이루어지는 토양에서 살고 있으니, 저의 지나온 여정을 쉽게 표현하면  “팔자가 늘어진” 인생입니다.

물론 미국에 와서 소위 “산전, 수전, 공중전, 수중전, 우주전…” 다 겪은 저의 인생이 겉으로는 시편 기자의 다음과 같은 고백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시 90:10).

 

그러나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라는 말은 공감하지만 하나님의 목적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 상속자 된 교회 안에서 살고 있는 저에게 그의 고백은 와 닿지 않습니다.

제가 살아온 연수가 말해주는 것이 “수고와 슬픔뿐”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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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저에겐 사도 바울의 다음과 같은 고백이 더 실감나게 와 닿습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전 15:8)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 God’s free gift)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후 9:15)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엡 3:8)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하나님의 아들의 믿음, 곧 나의 믿음이 아닌 그리스도의 믿음에 의해) 사는 것이라.” (갈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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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물론 수고와 슬픔이 있고, 날아가고 있을 정도로 시간이 금방 흘러가지만,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창세 전부터 계획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알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교회로 살고 있다면 “팔자가 늘어진” 것임을 저의 인생이 증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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