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기독 연구원 느헤미야 라는 단체에서 한국교회 개혁을 위한 포럼을 열었다고 합니다.
한국교회의 민낯을 드러낸 영화 ‘쿼바디스’가 제기한 문제들을 심층 분석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자리였다고 합니다.
이번 포럼의 주제는 ‘예배당 건축’ 이었다고 하는데, 다음은 거기서 발제를 맡은 연구위원들의 의견을 [뉴스앤조이]가 간추린 내용의 일부입니다.
“건물 교회를 무조건 비판해야 하는 건 아니다. 건물 교회는 정기적으로 열리는 예배나 신자들의 회집 장소로서 필요하다. 교회 공간은 예배나 모임이 있을 때만 사용하기 때문에, 공간 활용도가 낮고 낭비적이라는 비판이 일견 타당하지만, 교회가 일반 회사와는 다른 점도 인정해야 한다. 문제점을 인식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이런 이유로 모든 형태의 건물 교회를 무가치하고 무용한 것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문제는 일부 목회자들의 탐욕이다. 신약시대에 들어서면서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화목제물이 되셨다. 성전의 제사 의식은 종결된 것이다. 그렇기에 이제 성전은 더 이상 건물이 아니다. 그럼에도 목회자들은 교회에 대한 교인들의 충성심을 자극하고 교회 성장 효과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교회당을 성전이라고 부른다. 보이지 않는 예수를 보이는 것으로 대체한 것이다. 심지어 예배당 건축이 목회의 큰 열매이자 최종 목표라고 생각하는 목사도 있다.
대형 교회를 목회하는 목사와 그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에게 하나님은 교회 건물의 웅장함만큼 위대한 분이 된다. 건물이 클수록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이야기된다. 작고 초라한 상가 교회에서는 그 왜소함만큼 작고 초라한 하나님이 된다.” (김동춘 교수)
“성서는 예배 공간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가.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지시하신 장소였다. 신명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할 때 예배를 드릴 공간으로 유일한 ‘성소의 중앙화’를 요구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이방 종교와의 혼합이나 우상숭배로 인한 종교의 타락 위험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지, 하나님이 예배 공간에 제약을 받으시는 분이라는 걸 뜻하는 게 아니다. 신약으로 넘어와서, 예수님이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훈계하시고 사흘 만에 허문 성전을 세울 것이라 말씀하신다. 이는 친히 성전이 될 자신을 미리 선언하는 모습이다. 건축물로서 성전이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배 자체로 보면, 이스라엘 공동체가 행위와 의식만 있고 삶에서 사회적 약자를 무시하거나 외면할 때 하나님이 그 예배를 더 이상 받으시지 않는다고 말한다. 결국 참된 예배는 예배를 드리는 공간보다 중요하다. 예배드리는 사람의 생각과 믿음, 그리고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이 가장 중요하다. 만일 삶이 종교 행위로만 예배당 안에서 나타난다면 그것은 가식이고, 포장된 욕망일 수 있다. 일상의 삶과 종교 행위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나타나야 하기 때문이다.” (조석민 교수)
“성전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규정하고 지탱하는 가장 핵심적인 매개 중 하나였다. 이에 하나님의 백성임을 자처했던 이스라엘에게 성전은 본인들의 정체성을 상징할 수밖에 없었다. 신약시대로 넘어와, 이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었다. 이후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까지 ‘성전’으로 보았다. 복음이 이방인에게도 증거되었을 당시, 초대교회는 유대인이 가지고 있는 성전에 대한 열성에 본질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래서 스데반은 사도행전 7장에서 자기를 변호할 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밖에서 영광스런 임재가 나타났던 사례들을 들며, 하나님이 성전과 무관한 이방의 땅에서 임재를 드러냈다고 설명하고 있다. 스데반의 비판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현대 교회의 움직임이 왜 위험한지 보여 준다. 이런 우상숭배적 경향은 그리스도와 교회에 관한 결정적인 복음의 통찰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치명적인 이단 사설이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무리로 확장한 성전 개념은 현대에서, 초대교회가 그러했듯,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임이기도 하다. 하지만 일상적 삶의 리듬에 취해 영적인 삶의 역동을 상실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를 참된 예배라고 말한다. 바울은 그런 예배를 우리의 몸,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라 선포한다.” (권연경 교수)
다 일리 있고 공감이 가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발제가 끝나고 많은 질문이 쏟아져 나왔는데, 한 참석자의 “현 상황에 대한 비판은 나왔지만, 일반 교인들이 실천할 수 있는 대안이 부족한 것 같다” 라는 질문에 대해 발제자들의 입장은 “대안은 사실상 없다”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즉, 현대 교회의 문제점은 예리하게 지적할 수 있지만 대안은 알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기사를 읽고 그럴 수 밖에 없는 제도권 교회의 현실을 또 다시 보았습니다.
“대안은 사실상 없다.”
솔직해서 좋긴 한데, 정말 그럴까요?
하나님께서 일찌기 대안, 아니 ‘원안(原案)‘을 주셨는데도 거부하는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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