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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7

요한계시록과 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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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 중에 요한계시록을 미래에 실지로 벌어질 내용을 기록한 예언이라고 믿는 사람이 많습니다. 계시문학이라는 장르인 요한계시록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오류를 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만가지 이상한 종말론이 등장해서 사람들을 헷갈리게 하고 오도하곤 합니다. 아마 앞으로도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이런 오류를 범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계속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실지로 벌어질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메시지를 코드를 사용해서 전달한 것으로써, 소위 말세에 벌어질 일이 아닌 하늘과 땅에 동시에 존재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진면목을 밝혀준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있는 코드를 웬만큼만 알고 읽어도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바로 해독해서 오늘날 참된 교회 생활이 어떤 것인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대로 알고 읽으면 요한계시록이 바로 지금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서 이루시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깨닫게 해 줄 것입니다.

 

아래는 제가 쓴 책인 거품 빼고 보는 요한계시록 (2009년, 대장간)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이 코드로 되어있음을 설명한 내용입니다.

 


 

필리핀의 골프장에서는 샷을 잘하거나 버디를 잡거나 할 때 ‘신동파’ 또는 ‘동파’ 라는 소리를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고 합니다. 또 시내버스 기사나 택시 기사들도 자동차에 ‘신동파’ 라고 써 붙이고 다니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필리핀에서 ‘일이 잘 풀린다.’ 또는 ‘행운’, ‘성공’ 등의 의미로 사용되는 이 말을 지금 50대 이상의 한국인은 아마 금방 알아들을 것입니다.

 

오늘날 요한계시록의 내용이 낯선 이유

 

필자가 중학생 때인 1969년의 방콕 아시아 농구 선수권대회와 1970년의 방콕 아시안게임 농구경기 라디오 중계방송을 지금도 잊을 수 없는데, 그 당시 한국은 신동파라는 걸출한 농구 선수의 신들린 활약으로 두 대회 다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1969년 대회까지 한국은 아시아 농구의 최강인 필리핀에 눌려 단 한 번도 우승을 한 적이 없었는데, 이 대회의 결승전인 필리핀과의 경기에서 무려 50점을 획득한 신동파 선수의 대활약에 힘입어 95대 85로 필리핀을 꺾고 우승을 차지하는 이변을 연출했습니다.

 

이때 국기가 농구였던 필리핀 국민은 당연히 이길 줄 알았던 경기에서 자국 대표팀이 패하자, 종횡무진 코트를 누비며 승리를 앗아간 신동파 선수를 주목하고 그를 ‘농구의 신’ 처럼 떠받들기 시작했습니다.

이후로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는 모르지만, 필리핀 사람들은 좋은 일이 있을 때 ‘신동파’ 라는 말을 즐겨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요즈음도 40대 이상의 필리핀 사람 중 신동파 선수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고, 20대 이상도 절반 정도는 그의 이름을 알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만일 서양 사람 앞에서 ‘신동파’ 라고 한다면 어떻게 반응할까요? 서양 사람은커녕 아마 요즈음은 한국의 십 대나 이십 대 앞에서 ‘신동파’ 라고 해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새로 나온 정치 세력이나 조직폭력 일당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40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한국의 신세대에게 생소한데, 만약 2천 년이 지나면 어떻겠습니까? 이게 바로 오늘날 우리가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금방 이해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당대의 교회 성도들은 읽기만 해도 통했던 코드가 오늘의 우리에게는 낯설게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신동파’ 라는 말이 요즘 세대에게 낯선 것과 매한가지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숫자 코드

 

피타고라스라는 이름을 들으면 우리는 금방 수학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그가 살았었던 지금부터 2천 5백 년 전에 수학이라는 학문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눈으로 봤을 때 그가 수학자이지, 실은 그가 종교적 개념을 숫자로 설명한 최초의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에게서 영향을 받은 후대의 그리스 사람들이 종종 숫자로 메시지를 전달하곤 했는데, 이것을 유대인들이 받아들여 계시문학의 글에 코드로 사용했고, 나중에 그리스도인들 역시 이것을 받아들여 코드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계시문학 형식의 책인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숫자는 전부 다 어떤 개념을 설명하는 코드이지 우리가 생각하는 산수의 숫자가 아님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을 놓치면 앞으로 올 대환란이 7년이라든지 (요한계시록엔 7년이란 말이 없는데, 이것은 3년 반을 두개 더해서 억지로 만들어낸 것임), 대환란 때 구원받을 유대인의 숫자가 십사만 사천 명이 될 것이라든지, 실지로 천 년간 지속할 왕국이 도래할 것이라든지, 천국에 가면 정말 진주대문이 12개가 있을 것이라는 등의 순진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런 숫자는 다 뭔가를 상징하는 것이니 실지 숫자가 아닙니다. 숫자로 된 코드라는 말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주요 숫자 코드가 1세기 당시에 무엇을 상징했었는지 아래에 소개합니다.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마다 이런 숫자를 보면서 오늘날의 숫자 개념은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아래와 같은 상징적 개념을 떠올려야 바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 합심. 동역, 배가된 힘, 공동체
  3 = 신성, 하늘, 하나님
  4 = 땅, 피조물, 세상
  7 = 완전 (3 + 4, 즉 하늘과 땅을 합쳐놓은 것이므로 ‘완전함’을 상징. 요한계시록에 제일 많이 나오는 숫자로 모두 54번이나 등장함)
  6 = 불완전 (완전수인 7에 미치지 못한 숫자)
3.5 = 정체불명의 숫자, ‘알 수 없지만 제한됨’을 뜻함 (완전수인 7의 절반)
       요한계시록에 ‘3년 반’, ‘마흔두 달 (3년 반)’, ‘일천이백육십 일 (3년 반)’,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사흘     반)’ 등으로 나오는데 전부 다 같은 뜻임
10 = 사람의 완전함, 사람의 힘 (그 당시엔 손가락 열 개와 발가락 열 개를 모두 다 가진 사람을 온전하도고 여겼음)
12 = 종교, 하나님의 선택, 하나님의 가족, 교회
100 = 세상
1000 = 메시아의 왕국, 하나님의 통치
144,000 = 12 x 12 x 1000 = 교회, 하나님의 백성
                 (24 = 12 + 12도 같은 개념)

 

 

요한계시록과 구약성경

 

앞에서 언급한 대로, 요한계시록은 어디를 봐도 구약성경의 내용이나 이미지가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구약성경으로 도배하다시피 한 책입니다. 누가 세어봤는지는 모르지만, 총 404절에 구약성경과 관련된 것이 무려 518개나 된다고 합니다.

주로 출애굽기, 시편, 이사야, 에스겔, 다니엘 등에 있는 내용이나 이미지가 사용되었는데, 물론 거기서 말하는 뜻을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라 뭔가를 상징하기 위해 메시지 전달 수단으로만 활용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일곱 인”의 처음 네 개에 등장하는 말들은 스가랴 1:7-17에서 따왔고, “일곱 나팔”과 “일곱 대접”의 처음 네 개에 나오는 재앙들은 대부분 출애굽기의 애굽에 내린 열 가지 재앙에서 이미지를 따온 것입니다.

종종 이것을 소위 대환란 때 실지로 벌어질 현상으로 오해하곤 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구약성경에서 따온 이미지로 하나님의 심판의 극렬함을 설명하려 한 것뿐입니다.

 

요한계시록이 이처럼 숫자 코드와 구약성경의 이미지로 가득한 책이라는 것만 알아도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데 있어 큰 실수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 그 내용이 코드로 기록된 계시문학임을 한시도 잊으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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