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 휘날리며

 

 

“태극기 휘날리며”

10년 여 전에 히트 친 한국 영화의 제목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매년 3월 9일이 되면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저의 머릿속에 새겨져 있는 잊을 수 없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41년 전 오늘,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저는 부모님과 형, 누나들, 동생과 함께 미국 이민 길에 올랐습니다.

애국자를 자처하며 조국을 배반하고 이민 갈 수 없다면서 거부했지만, 전가족 이민에 제가 빠지면 다른 식구들이 갈 수 없다는 이유 때문에 마지못해 미국으로 향하던 저의 발길은 무거웠습니다.

 

그때 저를 배웅하러 나온 친구들이 김포공항에서 저의 착잡한 마음을 위로해주려는 듯 저를 헹가래치며 태극기를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 태극기를 받아 고이 접어 양복 안 주머니에 넣던 저의 머릿속엔 일제 강점기 때 일본 왕을 폭탄으로 저격하기 전 태극기 앞에서 선서하던 이봉창 의사의 사진이 떠올랐습니다.

어렸을 때 보았던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많은 사진 중에서 그 사진이 가장 인상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저였기 때문에 김포공항을 떠나 일본 도쿄의 하네다공항에서 미국행 비행기를 갈아타기 위해 두시간을 기다릴 때, 나도 모르게 친구들이 선물한 주머니 속의 태극기를 꺼내 흔들어대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내가 그런 행동을 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 거의 반사적으로 취한 행동이었습니다.

공항 안의 오가는 그 많은 사람 앞에서…

형과 누나들이 쫓아와서 “너 미쳤냐”고 제지하지 않았으면 아마 한참 더 태극기를 흔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도 미워했던 일본 땅에 발을 딛고 있으니 속이 미식거려서 주체할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일제의 억압에 대한 역사를 아는 대한민국 사람은 누구나 다 그렇겠지만, 저는 특히 어려서부터 도가 지나칠 정도로 일본을 미워하며 자랐습니다.

저에게 있어서는 반일이 곧 애국이요, 애국이 곧 반일이었습니다.

 

이 저의 반일 애국심은 저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 같습니다.

어디서 났는지는 모르지만, 책이 귀하던 50여 년 전 충청북도의 시골 저의 고향집에는 몇 권 되지 않는 책들 중 독립운동가들의 사진을 모아놓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에겐 초등학교 입학 전 글을 배우기 전부터 이 사진첩을 늘 들여다보는 것이 자연스러웠습니다.

그 사진첩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고종황제, 을사늑약을 개탄하며 자결한 민영환, 이준 열사, 안중근 의사, 김좌진 장군, 윤봉길 의사, 이봉창 의사, 도산 안창호 등 수백 장의 사진이 실려있었는데, 이 사진들을 보며 나도 이 선열들처럼 조국을 위해 희생하겠다는 결심이 어린 가슴에 새겨졌습니다.

 

따라서 저에겐 길을 가다가도 라디오에서 애국가가 흘러나오면 그 자리에 서서 애국가가 끝날 때까지 부동자세를 취하는 것은 자동이었고, 나중엔 우리 민족이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이라는 생각으로까지 발전했습니다.

애국자 정도가 아니라 도가 센 민족주의자 내지는 국수주의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 후에 미국에 와서도 대학시절 캠퍼스에서 심심하면 고무신을 신고 강의실에 들어갈 정도로 한민족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는 것이 저에겐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미래의 진로에 대해 고민하던 시절인 고등학교 2학년 때 수학여행시 진해 해군사관학교에서 1박 2일을 지냈는데, 저는 생도들과 진지하게 토론을 하며 조국을 위해 봉사하는 길은 군인이 되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미국에 살던 저의 큰 누나가, 가세가 기울어 부모님과 동생들이 너무 고생한다며 미국 이민 초청을 하겠다고 했을 때 저는 너무 화가 나서 누나에게 장문의 편지를 띄웠습니다.

조국을 버리고 미국에 살면서 호의호식하는 매국 행위에 대해 부끄러운 줄 알라며 누나를 호되게 질타했습니다.

그러나 굶어 죽을지언정 조국을 버리고 떠날 수는 없다고 버텼지만, 결국 부모님을 비롯한 집안의 대세에 밀려 눈물을 머금고  미국 이민 결정에 따라야 했습니다.

 

미국 이민 수속이 한창이던 고등학교 3학년 초에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 3학년 학생 전원이 육군사관학교에 1박 2일 견학을 다녀왔습니다.

그곳에서도 몇 달 전에 갔었던 해군사관학교에서처럼 조국을 위해 군인으로 봉사하는 것이 나에게 가장 잘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미 미국 이민 결정을 내린 터라 참으로 아쉬웠습니다.

 

 

거기서 4학년 생도 두 명이 사용하는 기숙사 방에 저희 학교 학생 두세 명씩을 배정해서 함께 지내게 했는데, 그때 42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했었습니다.

육사 생도 두 명과 저희 두 명, 이렇게 네 명이 바닥에 둘러앉아 함께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 생도 하나가 뜬금없이 내뱉은 다음과 같은 말 때문이었습니다.

“조국을 버리고 미국 이민 가는 놈들은 다 때려죽여야 한다.”

 

‘오금이 저리다’는 표현이 아마 이런 때를 두고 하는 말 같았습니다.

그런 말이 나올 수 있는 대화가 아니었는데 그렇게 불쑥 말을 하니 제가 어쩔 줄 몰라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마치 도둑질하다가 들킨 것 같은 느낌이 가시지 않아 그 기숙사 방에 있는 동안 영 찜찜해서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한편, “아, 나보다 더 지독한 민족주의자가 있구나!” 하며 그 생도에게 열등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이런 저였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도 한동안 복음과 민족주의가 혼합되어 헷갈린 상태로 살았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하는 것이 고귀한 것이긴 하나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순수한 복음과 절대로 섞으면 안되는데 제가 워낙 그런 성향이 강하여 떨쳐버리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종종 소위 기복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속물이라고 질타하는 기독교인들 중 애국과 호국과 민족주의를 부르짖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 역시 기복신앙임을 그들은 알지 못합니다.

자신들은 노골적으로 복을 추구하는 저질 신앙과는 차별된, 나라와 민족을 위하는 고상한 신앙을 소유했다고 생각하지만 착각입니다.

복음이 개인이나 가정의 필요를 채우는 수단이 되는 것이나, 어떤 집단이나 사회나 국가의 필요를 위한 수단이 되는 것이나 다 거기서 거기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갖다 쓰기는 매한가지라는 말입니다.

둘 다 인본주의 기독교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닙니다.

복음은 오로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목적은 바울이 강조한 다음과 같은 성경구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엡 3:5-11)

 

위의 본문 맨 마지막의 3장 11절을 헬라어 원문에 더 가깝게 번역한다면,

“곧 하나님께서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정하신 영원한 목적대로 하신 것이라”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이루고 싶으신 일이 “영원한 목적” 곧 창세 전의 목적인데 이것을 교회를 통해 이 땅에 드러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육신의 몸으로 오셨던 예수님께서 이제 십자가, 부활, 승천, 성령강림을 통해 이 땅에 ‘형태가 다른 몸’인 교회로 오신 것이 그 목적의 성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이제 교회의 지체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 이 땅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고귀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데 있어 애국이니 호국이니 민족주의니 하는 것은 설 자리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저는 지금도 일본이 하는 짓은 밉기 짝이 없습니다.

아직도 과거에 대한 반성 없이 역사를 왜곡, 날조하고,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그들을 볼 때 열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저의 삶은 오로지 하나님께서 하시고 싶은 일, 즉 교회로 살며 교회를 세워나가는 것에 올인 할 뿐입니다.

물론 이런 교회는 현대 제도권 교회가 아니라 신약성경이 말하는 유기적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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