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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03

지도자의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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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요일 미국 최대의 스포츠 이벤트인 수퍼보울(Super Bowl)이 열렸습니다.

수퍼보울은 다른 어떤 스포츠 종목의 추종을 불허하는 프로 풋볼(미식축구)의 결승전인데 이번에 역대 최고 시청율을 갈아치우며 50%에 육박하는 시청율을 기록했습니다.

 

이번 수퍼보울 TV 중계 때 30초짜리 TV 광고가 450만 달러, 즉 1초에 무려 15만 달러(약 1억 6천만 원)인 것만 봐도 그 위력을 실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집에서 수퍼보울을 시청하기 위해 새로 TV를 장만한 사람들이 자그마치 천만 명이나 되고, 세시간 남짓 수퍼보울을 시청하면서 그 사이에 먹어치우는 닭 날개가 12억개 이상, 마시는 맥주는 12억 리터 이상, 피짜는 400만개, 감자칩은 5천 톤, 팝콘은 1700 톤쯤 된다고 하니 가히 미국 최대의 스포츠 이벤트라 할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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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수퍼보울에서는 보스톤 소속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가 전년도 챔피언인 씨애틀 씨혹스를 상대로 손에 땀을 쥐게하는 명승부를 벌이며 28-24로 가까스로 꺾고 우승을 차지했는데, 언론에서는 “뉴일글랜드가 이겼다”는 것보다는 “씨애틀이 졌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더 낫다고 평합니다.

그 이유는 씨애틀이 다 이긴거나 마찬가지인 경기를 종료 25초전에 헤드코치인 피트 캐롤의 작전 실수로 뉴잉글랜드에게 헌납해버렸기 때문입니다.

 

터치라인 1야드를 남겨놓은 상태에서 시간도 충분하고 공격 기회도 두번이나 더 남아있었는데도 그가 내린 작전 지시가 상식에 반하는 것이었고, 하필이면 그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 상대 팀에게 공을 빼앗기는 결과를 낳아서 피트 캐롤 코치는 두고두고 욕을 먹게 생겼습니다.

그런 경우엔 러닝백으로 하여금 공을 들고 뛰게 하는 것이 풋볼 경기에 있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정석인데, 쿼터백이 공을 던지도록 지시를 내려서 쿼터백의 실수로 상대편이 그 공을 가로채는 바람에 코앞의 우승이 날아가버렸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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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데, 피트 캐롤 코치는 과거에 성적이 시원치 않았던 씨애틀 팀을 작년에 챔피언으로 등극시켰고, 씨애틀에 오기 전엔 남가주대학(USC)의 헤드코치로 그 대학을 대학 풋볼 챔피언으로 이끈 유능한 코치입니다.

대학팀과 프로팀 둘 다를 챔피언에 이끈 헤드코치는 역사상 세명 밖에 없는 대단한 업적인데, 피트 캐롤이 바로 그 중 한 명입니다.

그러나 이런 명 코치가 보통 사람도 다 아는 정석이 아닌 비상식적인 작전 지시를 내리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아서 뉴스에 계속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잘 나가다가도 이렇게 지도자의 순간적 판단 착오로 말미암아 다 잡아놓은 우승이 물건너가는 경우가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엔 상식을 뛰어넘는 지도자의 작전 지시로 경기의 흐름을 완전히 바꿀 수도 있습니다.

또 지도자의 무모하게 보이는 선택으로 예상을 뛰어넘는 결과를 얻기도 합니다.

2002년 월드컵 축구에서 히딩크 감독이 무명의 박지성 선수를 발탁한 것이나, 지난 주에 끝난 아시안컵 축구에서 슈틸리케 감독이 무명의 이정협을 발탁한 것이 그런 예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 월드컵 4강과 이번 아시안컵 준우승에 결정적 역할을 한 그 선수들의 대활약이 바로 그런 과감한 지도자의 선택이 가져온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박지성 이정협

 

이런 지도자의 선택은 스포츠에서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군대… 그리고 가정에서… 삶의 전반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때로는 지도자의 선택 하나가 나라를 흥하게도 하고 망하게도 하고, 기업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맥아더 장군의 탁월한 선택이 인천상륙작전으로 이어져 대한민국을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에서 구하기도 했지만, 그의 판단 착오가 작전의 실패를 가져와서 물리칠 수도 있었던 중공군에게 밀려 흥남철수와 1.4 후퇴를 야기시키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지도자의 선택이란 것이 이 세상에서는 결정적일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은 지도자 없이는 절대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인간은 늘 어디에서나 조금이라도 더 나은 지도자가 나타나기를 바라며 살 수 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한 나라의 왕이나 대통령이나 총리는 물론이고, 마을의 이장도 누가 되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서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교회에 이 세상의 지도자와 같은 것을 두신 적이 있습니까?

물론 신약성경적으로 그 대답은 “아니다” 입니다.

 

하지만 지난 2천 년 가까이 교회는 이 세상의 영향을 받아 교회 안에 이 세상의 지도자와 같은 직책을 만들어 그것에 의해 좌지우지 되어왔고, 그 직책을 차지한 사람들의 잘못된 선택에 의해 수많은 고통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지도자 라는 직책은 그것이 정계든, 재계든, 군대든… 스포츠 팀이든… 교회든 관계없이 크고 작은 선택을 할 때 주도해야 하고, 인간이므로 당연히 선택의 기로에서 판단 착오를 범할 가능성을 늘 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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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인간 지도자가 차지하는 직책은 두시지 않고 교회가 기능에 의해 유기적으로 돌아가도록 하셨습니다.

그 기능을 뭐라 부르든, 중요한 것은 어떤 기능이든지 혼자서 선택하도록 그 한 기능에 권위를 부여하시지 않고 교회의 지체 모두가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함께 파악하고 함께 결정하도록 모두에게 똑같은 권한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교회에서는 씨애틀팀의 피트 캐롤 코치와 같이 결정적이고 치명적인 선택을 혼자 할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는 이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이므로 인간 지도자의 선택에 의해 좌우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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