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여리고에 입성하시자 마자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벌떼같이 모여들어 마치 카톨릭 교황이 엊그제 광화문 광장에 나타났을 때처럼 환호하기 시작했습니다 (눅 19:1 – 2).
그동안 소문으로만 듣던 “다윗의 자손” 예수,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라는 사람이 왔다는데 집에서 낮잠이나 자고 있을 유대인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방금 전에 그 “다윗의 자손”이 맹인의 눈을 뜨게 했다는 따끈따끈한 뉴스를 들은 터라(눅 18:35 – 43), 너나 할 것 없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메시아가 오면 심판 대상 1 순위, 아니 0 순위였을 국세청 여리고 지청장이던 삭개오는 아마 초긴장 모드에 돌입했을지도 모릅니다.
일제에 빌붙어 동족의 고혈을 빨아먹던 친일 관리들처럼, 로마제국 식민지의 세리장으로서 온갖 악행으로 동족들을 괴롭혀왔기 때문입니다.
한편 삭개오는 속으로 ‘예수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라고 하는데 그분을 만나면 모든 것을 청산하고 새로운 길을 가겠다’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동안 쌓이고 쌓인 죄의식에 눌려왔던 삶에서 해방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는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그는 호기심이 발동하여 예수를 보러 나왔고, 급기야는 뽕나무에까지 올라가게 된 것입니다 (눅 19:3 – 4). 그리고 예수님께서 수많은 관중 속에서 그를 발견하시고는 그에게 VIP 대접을 하셨습니다.
자신을 환호하는 그 많은 사람 중 유독 삭개오만이 군계일학으로 돋보이는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눅 19:5)
귀를 의심케 하는 이 한 마디에 삭개오의 전 인생이 뒤집혔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에게 들어왔던 다윗의 자손, 자기같은 인간말종을 심판하러 오실 것이라던 메시아의 입에서 흘러나온 뜻밖의 말에 놀란 정도가 아니라, 순간적으로 그 한 마디에 예수님의 진면목이 다 드러나 예수님을 바로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초막절에 모였던 수많은 군중 속의 군계일학인 “날 때부터 맹인된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요 9:1).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불쌍한 걸인을 놓고 예수님께 교리 토론하자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요 19:2)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쟁점은 맹인으로 태어난 것이 “죄”냐 아니냐는 것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죄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고, 문제는 그 죄가 누구의 것이냐는데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종교 지도자들의 가르침을 귀가 마르고 닳도록 들어왔기 때문에 반사적으로 그렇게 질문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맹인은 나면서부터 그때까지 골 백번, 아니 골 천번, 골 만번도 더 들어온 그 지겨운 소리에 넌덜머리가 나서 지금은 그 순간이 그냥 빨리 지나갔으면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속으로,
이것들이 나를 놓고 또 교리 논쟁하는구나. 랍비라는 것들의 대답이야 늘거기서 거기지. 맨날 하나마나 뻔한 대답일 텐데 지겹지도 않나?
오늘 이 랍비는 ‘2지 선다형’ 문제 중 몇 번을 택할까?
보기를 두개쯤 더 만들어 ‘4지 선다형’으로 좀 만들지, 이렇게…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아니면 아버지나 어머니나 그 위의 조상이니이까?’
그래야 내 죄가 상대적으로 비율이 좀 줄어들거 아냐?
이 랍비는 또 뭔 소리를 지껄이려나?
적선하지도 않을 것들은 다들 빨리 좀 꺼져버렸으면…
이런 식으로 중얼거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위의 삭개오의 경우처럼 이 맹인도 자신의 귀를 의심케 하는 대답에 귀가 솔깃해졌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요 9:3)
난 생 처음 들어보는 이 은혜롭고 단호한 말에 그 랍비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이 크게 발동했을 것입니다.
그때 그가 땅에 침을 뱉더니 진흙을 이겨 자기의 눈에 바른 다음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했습니다 (요 9:7).
순간 ‘오늘이 안식일인데, 괜히 저 사람 말 듣고 실로암까지 한참 걸어갔다가 안식일 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출교 당해 예루살렘에서 내쫓겨 구걸도 못하고 굶어 죽으면 어떻게 하나…’ 라는 두려움이 엄습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지금까지 한번도 자신의 처지에 대해 그런 은혜로운 관점에서 보고 말한 사람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뭔가 모를 신뢰가 생겨 그 랍비의 말대로 실행에 옮겼습니다.
그리고 거짓말같이 눈을 뜨게 되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안식일을 어겼다고 궁지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이럴 때는 앞에서 언급했던 요한복음 5장의 ‘싸가지 결핍증’에 걸린 38년 묵은 병자처럼, 십중 팔구는 자기가 살려고 머리를 굴려 예수님을 고발하는 길을 택하고 자기는 빠지는 게 보통일 것입니다.
안면몰수 모드로 들어가는 것.
그의 부모까지도 두려운 나머지 아들이 눈을 뜬 것에 반가워할 겨를도 없이 모든 것을 자기 아들 책임으로 돌릴 정도로 공기가 탁한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요 9:18 – 23)
그러나 이 사람은 자신의 안위는 아랑곳없이 두 번씩이나 소환을 당해도 끝까지 예수님을 변호했습니다.
그것도 서슬이 퍼런 종교 지도자들 앞에서 주눅들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약을 바짝바짝 올리며 열받게 하고, 또 그들에게 모욕을 주며 예수님을 감싸다가 결국 내쫓기고 말았습니다 (요 9:27, 31 – 34).
이런 그를 예수님이 그냥 모른체하고 놔두실리가 없지요.
그를 VIP로 여기셨습니다.
그가 내쫓겼다는 말을 들으시고 일부러 그를 만나셔서 자신의 진면목을 알게 하셨습니다 (요 9:35 – 41).
여리고 거리에 벌떼같이 모여든 관중 중 한 명인 삭개오, 초막절 행사장을 찾은 인산인해의 순례자 중 한 명인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 군계일학과도 같은 예수님의 VIP 입니다.
예수님의 진면목을 알게 되어 예수님의 VIP가 된 이 사람들이 자신의 가치에 얼마나 감격했을까요?
한국을 방문한 일개 사람에 불과한 카톨릭 교황의 손을 잡았다고 손을 씻을까 말까 고민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그에게서 영세를 받았다고 구름 위를 떠도는 것 같았다는 사람도 있는데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아들의 VIP가 된다면 어떨까요?
그럼 그 수많은 관중이나 순례객들은 어째서 예수님의 눈에 띄지 않은 것일까요?
여기에 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요 8:31 – 33)
초막절에 왔다가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많은 사람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그들의 반응입니다.
곧 죽어도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자손” 이라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아무런 문제가 없고, 문제가 있다면 예수님이 과연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었는데 메시아라고 믿을 테니 뭔가 내놓으라는 식의 반응입니다.
초막절은 소위 ‘메시아 대망절’ 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던 절기로 평소에도 늘 메시아를 기다리던 유대인들의 기대가 극에 달하는 때였으므로 “명절 중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요 7:10) 팔자 고치려 했는데,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자신들의 기대와는 동떨어진 “진리”니 “자유”니 하는 말에 열받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이 앞에서 살펴본 그것입니다.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 (요 8:39)
하나님의 VIP는 그 가치에 걸맞은 삶을 살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여리고성의 거리에 모여든 수많은 관중은?
그들의 상태도 역시 다음의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더라.” (눅 19:11)
여리고성의 군중들이 기대하는 “하나님의 나라”인 메시아 왕국의 회복에 대한 기대, 즉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다윗처럼 왕이 되시면 그 밑에서 팔자 고치려는 그들의 속물 근성을 누가복음의 저자가 말하고 있습니다.
초막절에 예수님을 믿은 수많은 사람과 여리고성에서 메시아 왕국을 기대하고 예수님께 모여든 많은 군중이 마치 오늘날 예수님께 뭔가를 바라고 예배당에 모여 예수님을 환호하는 사람들을 연상케 한다고 말하면 비약일까요?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아직도 예수님을 믿고 자신이 기대하는 팔자를 고치려는 근성이 저 마음 속에 남아 도사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비록 호기심에서 시작되었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VIP로 영광의 자리에 올라가서 사는 감격을 누리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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