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늘 연일 미국 주류 신문과 방송의 톱 기사를 장식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코미디의 천재’로 불리는 로빈 윌리엄즈라는 배우인데 어제 자기 집에서 목을 맨 채 호흡이 끊어진 상태로 발견되었고, 사인은 자살로 판명났습니다.
배우 하나 죽었는데 뭐 이렇게까지 떠들썩할 필요가 있겠냐고 하겠지만, 로빈 윌리엄즈는 수많은 동료 배우는 말할 것도 없이 오바마 대통령까지도 “독보적인 존재였다” 라고 애도할 만큼 뛰어난 명품 배우였습니다.
그는 지난 40년 가까이 TV와 영화를 넘나들며 자신의 끼를 발산했고, 아카데미 주연상 후보 세 번에 아카데미 조연상을 수상할 정도로 인정받는 연기자였습니다.
저도 대학시절 로빈 윌리엄즈의 묘한 매력에 이끌려 그가 첫 주연한 TV 시리즈를 시험기간에도 챙겨서 시청할 정도로 그를 좋아했었습니다. 그를 전국 스타가 되게 한 ‘Mork and Mindy’ 라는 프로였는데, 그때는 재방송도 없고 DVD는 커녕 비디오도 없던 시절이라 방송을 놓치면 다시 시청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제가 좋아하는 배우가 20년 전 어느 날 제가 살던 캘리포니아의 버클리에 나타났습니다. 그것도 다름아닌 저의 집 바로 옆길에 있는 집을 빌려 영화 세트장으로 꾸미고 일주일 동안 거기서 영화를 찍었습니다.
초등학생이던 저의 두 아들도 그를 좋아하던 터라 우리는 촬영 중 그가 쉬는 시간을 틈타서 수많은 관중을 제치고 그에게 다가가 악수를 하고 싸인을 받는데 성공했습니다.
가까이에서 본 로빈 윌리엄즈는 제가 그동안 봐왔던 거들먹거리는 유명인들과 달리 꽤 겸손한 사람이라서 더욱 그를 좋아하게 되었는데, 이런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 죽었다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로빈 윌리엄즈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나서 그에 대해 찾아보았더니 최근까지 그는 알콜 중독과 조울증에 시달려왔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평생 마약 남용에다가 두 번의 이혼으로 심신이 많이 지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남을 웃겨야 했고 또 스트레스를 받아가며 연기자 생활을 해야 했으니 참 안됐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교수가 우울증에 의한 자살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은 우울증과 자신이 무가치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나머지 자신들의 인생에서 벌어졌던 놀랍고 좋은 모든 일들을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우울증과 자살하고 싶은 생각으로 현실을 왜곡되게 봅니다. 자신에게 아내가 있어도, 또 사랑을 많이 받고 있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한 마디로, 우울증에 걸리면 아무도 못 말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물론 이 세상에서는 우울증이냐 아니냐를 놓고 전문가들이 판단해야 하겠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는 어디서부터가 우울증인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달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알고,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알고, 그 목적을 이루어가는 예수 그리스도와 똑같은 상속을 받은 공동체 안에 있으면서도 심심하면 자신이 무가치하다는 생각, 다른 사람들에게 받은 상처, 불만, 불만족 등에 사로잡혀 있으면 영적 우울증일 것입니다.
위의 교수의 말을 여기에 적용해보면,
‘영적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은 자신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나님의 복음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파악하지 못한다. 그래서 현실을 왜곡되게 본다. 자신에게 복음이 있고 교회 공동체 안의 형제자매가 있어도, 또 그들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있다 해도 상관없다.’
이런 우울증은 자기 중심, 자기 사랑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아무도 못 말립니다. 자신을 비어 종의 형체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복음과 정반대의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제대로 알고 이것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자신이 예수님짜리의 가치가 있음을 알고 그런 우울증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정반대로 못 말립니다.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 23:33-34)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행 7:57-60)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딤후 4:16)
이 사람들이야말로 진짜 ‘못 말리는 사람’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스데반, 바울. 아무런 상처도, 불만족도, 불평도, 불만도, 원망의 그림자도 없는 사람들.
이들은 죽어가면서도 어떻게 이럴 수 있었습니까?
이것이 복음의 위력입니다. 복음의 감격 속에 있으면 누구나 이렇게 못 말리는 사람으로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짜리임을 아셨고, 스데반과 바울은 자신이 예수님짜리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 교회생활을 살고싶다면서 몸만 그 안에 있을 뿐, 아직도 자기 사랑에 인이 박혀 시시콜콜하게시리 불만족과 다른 사람들을 향한 손가락질과 상처와 불만에 사로잡혀 있습니까?
상처받고 나서 한참 고민 고민하고 동네방네 꾸정물 마구 튀기다가 간신히 해결하고 용납, 용서하는 수준입니까?
아니면 위의 사람들처럼 아예 상처와 불만과는 따로 노는 사람입니까?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우울증으로 못 말리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위의 멋진 사람들처럼 복음의 감격에 사로잡힌 예수님짜리 가치의 못 말리는 사람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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