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할 때 “이순신 장군은 구원받았을까요?” 라는 질문이 나오는 것은 전도하는 사람이 알고 있는 복음이 딱 그 수준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말하자면, 저도 왕년에 그랬지만 전도하는 사람 자신의 신앙이 개인의 영혼 구원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뜻입니다.
복잡하게 따질 것 없이 이것은 “예수 천당, 불신 지옥” 이라는 단순 논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물론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면 그런 논리를 뽑아낼 수 있습니다. 이런 논리 말고도 성경을 토대로 무궁무진한 다른 사상을 얼마든지 정립할 수 있습니다.
정통이든, 사이비든, 이단이든, 그 무엇이든 성경에서 끌어낸 논리와 사상과 교리를 주장하며 그 주장을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공통점이 무엇일까요?
철저하게 인간 중심, 자기 중심입니다.
인간 개개인의 필요와 유익, 그리고 자신들의 집단의 필요와 유익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교회라는 이름으로, 신앙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을 순종하고 섬긴다는 기치아래… 도사리고 있는 자기 사랑으로 충만한 인본주의인데, 다만 이것이 경우에 따라 신본주의의 옷을 입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원래 하고 싶으신 것이 무엇인지, 성경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말씀하시려는 게 무엇인지를 보지 않으면 성경은 개인의 필요와 유익을 채워주는 도우미 역할로 전락하게 됩니다.
물론 개인뿐만 아니라 어떤 집단이나, 단체나, 사회나, 국가의 이익을 위해 성경을 갖다 사용하는 것도 매한가지이겠지요.
다 인본주의의 극치입니다.
그럼 성경 전체에서 말하는 , 하나님께서 원래 하고 싶으신 것은 무엇일까요?
앞에서 인용했던 에베소서 3장 말씀의 후반부를 다시 인용하겠습니다.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목적)대로 하신 것이라.” (엡 3:7-11)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부터 갖고 계시던 계획이 교회로 드러났음을 바울이 설명하는 대목인데, 이것을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3:11을 헬라어 원문대로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곧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영원한 목적대로 하신 것이라.”
“영원한 목적”,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고싶으신 유일한 일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피조물인 우리는 당연히 이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나 개인이나 교회나 단체나 사회나 국가의 목적과 필요와 이익으로 성경에, 복음에, 구원에… 접근하면 이것을 놓치고 맙니다.
그 어떤 고상한 이유를 다 갖다대도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천박한 기복신앙일 뿐입니다.
여기 “교회로 말미암아”에서 “교회(에클레시아)”는 바울이 말하는 “복음”을 기초로, 즉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계획하신 “영원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존재하는 신약성경적 교회를 말합니다.
교회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신앙이나 사회나 국가를 돕기 위해 존재하는 ‘제도권 교회 조직‘과는 거리가 먼,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몸(유기체, 공동체, 커뮤니티)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영원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교회가 이 땅에 세워지는 것이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세우신 계획이기 때문에, 이 계획이 이루어질 수 없는 시대에 살던 개인의 구원 여부를 왈가왈부하는 것 자체가 월권이라고 생각됩니다. 전지, 전능하시고 공평하신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지 우리가 결론을 내릴 사항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물론 성경의 문자를 들이대면 할 말 없지만 성경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의도로 볼 때 우리가 이것에 대해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복음이 전파되기 전에 살던 사람들에 대해서 단순한 호기심으로 다음과 같이 추측해봅니다.
신학적으로 정립해서 주장하는 것이 아니니 저의 이런 견해에 시비는 걸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나 시간과 공간이 존재할 뿐, 하나님은 시공을 초월하시는 분이므로 모든 것을 다 한 눈에 보신다. 따라서 하나님의 눈엔 창세 전이나 창조 때나 이 세상의 끝이나 다 같은 시간대일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이해한 바울은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 (엡 1:4)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갈 2:20)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롭 6:3-6)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엡 2:5-6)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골 3:3)
이것이 시공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눈에 비친 우리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복음이 전파되기 전에 살던 사람들을 시간과 상관없는 눈으로 이렇게 판단하실 것이다: 그당시 사람들이 만약 복음이 전파된 후에 살았다면 복음에 어떻게 반응할까?
말하자면, 이순신 장군같은 사람이 오늘날 살았다면 복음에 어떻게 반응할까?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셨을까, 거부했을까? 그가 무신론자로 살았을까, 아니면 다른 어떤 종교에 귀의했을까? 그가 이단이나 사이비 집단에 몸 담았을까, 아니면 제도권 교회의 목사나 교인이 되었을까? 아니면 신약성경적 교회에 속했을까?
시공을 초월하시는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면 능히 이것을 아신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당시의 사람들을 이 기준으로 판단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공평하시기 때문에 이렇게 하실 것이다.
이게 호기심이 발동해서 전개해 본 저의 추리입니다.
이것에 의해 “이순신 장군은 구원받았을까요?” 라는 질문에 희망사항으로 답을 한다면,
“이순신 장군같은 분은 오늘날 살았다면 구원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냥 구원만 받지 않고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알고 신약성경적 교회에 속해서 그것을 충실하게 이루며 살고 있을 것이다”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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