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전 제가 미국에 이민 올 때 제 친구들이 김포공항에서 ‘애국자가 이민을 가니 가서 항상 조국을 기억해달라’는 뜻으로 태극기를 선물했습니다.
저는 일제 강점기 때 토쿄에서 일왕을 향해 수류탄을 던졌던 이봉창 의사처럼 양복 안주머니에 그 태극기를 고이 접어넣고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미국행 비행기를 갈아타야하므로 도쿄 하네다공항에서 두 시간 동안 기다리던 중, 일본 땅에 발을 딛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공연히 미식거렸습니다.
그때 친구들이 준 태극기가 생각났고 거의 반사적으로 안주머니에서 태극기를 꺼내어 활짝 펴서 유관순 누나처럼 흔들었습니다.
수많은 여행객이 오고가는 북적거리는 공항 안에서… 당연히 옆에 있던 형과 누나들이 너 미쳤냐면서 말리는 바람에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리는 틴에이저 때의 철없는 행동이었지만 그당시 저는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었습니다. 마치 무슨 민족을 위해 거사를 했다는 뿌듯함을 가지고… 어려서부터 일본을 아주 미워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저였기에 일찍부터 제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다름아닌 이순신 장군이었습니다. 물론 한국사람치고 그렇치 않은 사람은 간첩 말고는 없을 것입니다. 아니, 간첩도 아마 이순신 장군은 우러러 볼 것입니다.
그러니 어렸을 때 제가 제일 좋아해서 흥얼거렸던 노래 중의 하나는 당연히 이것이었겠지요.
이 강산 침노하는 왜적 무리를
거북선 앞세우고 무찌르시어
이 겨레 구원하신 이순신 장군
우리도 씩씩하게 자라납니다
하도 많이 불러서 지금도 이 가사가 또렷이 생각납니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이 위대한 것은 세계 전쟁사에 유례없는 연전연승을 한 탁월한 전쟁의 영웅이라는 사실 이외에도, 자신의 안위보다 오직 나라와 백성을 생각했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볼 때 우리 조상 중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쪼다 중의 쪼다인 선조의 시기와 핍박 때문에 수도 없이 고초를 겪고서도 말입니다.
이순신 장군을 모함하고 삼도수군통제사 자리를 꿰찼던, 쪼다 서열 둘째쯤 가는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여 거의 모든 군함을 다 잃은 후 그 자리에 복귀는 했지만, 선조가 수군을 폐지하려 하자 장군은 다음과 같은 장계를 올렸다고 합니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전선 12척이 남아 있나이다. 죽을 힘을 다하여 막아 싸운다면 능히 대적할 수 있사옵니다. 비록 전선의 수는 적지만 신이 죽지 않은 한 적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결전 바로 전 날에 예수님의 말씀 비슷한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려고 하면 죽는다(必死卽生 必生卽死)’ 라는 병법에 있는 그 유명한 말로 장병들을 독려하고 단 12척의 배로 133척으로 몰려오는 왜군을 대파했습니다.
이것이 명량대첩인데, 거기서 이순신 장군이 승리하지 못했다면 왜 수군은 330척이 넘는 배로 서해안을 타고 북상해서 육군과 합세하여 한양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결국 조선은 나라를 잃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그때로부터 350여 년 후에 태어난 저는 아마 ‘이나까 상’으로 불리며 일본인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아찔한데 어린 나이에 이런 역사와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의 만행에 대해 대충 듣고 나서 장군을 흠모하며 애국심을 길렀습니다.
이순신 장군 덕분에 배달민족으로 남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참으로 고맙기 그지 없었습니다.
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도 물론 장군을 존경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을 이전처럼 미워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한국인이건, 일본인이건, 그 누구건 모두 다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 3:28)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인종차별, 계급차별, 그리고 성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저는 일본이라는 나라가 하는 짓은 싫지만 일본 사람은 미워할 수 없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이순신 장군 얘기를 꺼낸 이유는 요새 한국에서 대 히트를 치고 있는 ‘명량’ 이라는 영화가 일주일쯤 후에 여기 미국에도 상륙하여 와싱톤 근교에서 상영한다고 해서입니다. 교회 형제자매들과 함께 관람할 예정인데 벌써부터 영화 내용이 궁금해지고 기다려집니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이 화제가 될 때마다 떠오르는 것은 ‘과연 이순신 장군이 구원받았을까?’ 입니다. 이전에 목회할 때 전도하러 나가서 가장 많이 받은 질문 중의 하나가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받고 천국에 갈 길이 없으므로 꼭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열심히 설명을 하면, “복음이 들어오기 전에 살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이순신 장군은요? 천국에 갔습니까, 지옥에 갔습니까?” 라는 맥빠지게 하는 질문을 종종 받았습니다.
사람들이 전도를 받았을 때 이순신 장군의 이름을 들먹거리는 이유는 아마 복음이 들어오기 전의 우리 조상 중에서 가장 위대했던 사람이라고 여기기 때문일 것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장군만큼 자신의 안위보다 오직 나라와 백성을 위했던 위인이 드물다고 생각하니까, 하나님께서 그런 위대한 분을 지옥에 보내실 리가 없다는 가정이 밑에 깔려 있는 것입니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저는 방어진을 구축하고 다음과 같이 대답하곤 했습니다.
“그걸 제가 어떻게 압니까? 하나님만 아시지요. 하지만 이순신 장군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당신이 어떻게 될지는 확실히 압니다. 당신은 저로부터 복음을 듣고 있기 때문에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언제부터 이순신 장군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걱정하셨습니까?…”
다소 공격적이긴 하지만 이것이 위의 질문에 제가 할 수 있는 대답의 전부였습니다.
그렇지만 뭔가 대답이 궁색하다는 인상은 지울 수 없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속시원히 할 실력은 못됩니다.
그때는 영혼구원에 대한 집념으로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라는 사도행전 4:12의 말씀을 들이대며 강하게 밀어붙였지만, 지금 생각하면 내가 하나님도 아니면서 복음이 없던 시대의 사람들이 천국 갔는지 아닌지를 함부로 쉽게 평가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과연 “이순신 장군은 구원받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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