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글은 태어나서부터 40년 가까이 기독교의 테두리 안에서 교회를 섬기며 사역에 몸을 바쳤으나 회의와 방황의 늪에서 좌절했던 분이 성경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분명히 깨닫고 쓴 간증문입니다. 본인의 허락을 받아 아래에 게재합니다.
저는 얼마 전에 하나님의 목적과 넘치는 사랑의 필요를 교회를 통해 알게 되고,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그분과의 관계 속에 들어가서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하나님의 절실한 사랑이 담긴, 십자가의 흘린 피로 써낸 사랑의 편지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니 성경이 너무나 명확해졌습니다. 만약 이것을 가지고 설교하고 목회를 하면 평생동안 잘 할 수 있을거란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룰 수 없고, 또 하나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챈다는 것은 소름이 끼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저 자신이 이제까지 그런 인생을 살았습니다. 제도권 교회에서 누구보다 드러나는 자리(성가대 지휘자)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면서 살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열심과 사람들의 인정이 저를 우쭐하게 만들고, 점점 하나님의 자리를 탐내는 대적자의 길을 걸어가고 또 그것을 평생 업으로 삼으려고까지 했습니다.
교회 연합집회나 어떤 이벤트가 있으면 온갖 아이디어를 동원해 올인 하고 밤을 새며 준비하여 발표해서 담임 목사님과 교인들을 기쁘게 하고 놀래키기도 했습니다. 교인들이 칭찬을 해주면 “나는 한 것이 전혀 없다”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처럼 그런 겸손한 모습을 보였지만, 실은 천사를 가장한 마귀처럼 살았습니다.
그 전에는, 하나님은 저에게 두려운 존재였습니다. 그분은 제가 어릴 적부터 배워오며 섬기던 무서운 하나님이었고 상과 벌을 주시는 분으로만 알았습니다. 여러 환경 속에서 제 삶에 우울증이 너무나 심하게 찾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미국에 와서는 그것이 극에 달했습니다. 살고 싶어서, 아니 때론 죽고 싶어서, 이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하나님께 빌고 또 매달렸습니다.
성경도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없이 문자로 밖에 볼 수 없었습니다. 아이를 잃어 버리고 찾아 다니는 아비의 마음만이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오해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그 마음과 소원을 대신 들어드려야 하고 하나님은 그것만을 기뻐하신다고 생각하여 열심히 전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미친 사람처럼 전도했습니다. 뉴욕의 거리와 지하철에서 매일같이 히스패닉들, 중국인들, 일본인들을 만나 전도하며 자주 욕을 먹기도 했지만, 하나님이 너무 두려워 그런 것쯤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럴 때 하나님이 저를 더 긍휼히 여겨주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숨이 멎을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해왔기 때문에 전도는 그것으로부터의 유일한 돌파구였습니다. 그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었으며, 극심한 우울증과 공황장애 같은 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건 하나님만 해결 하실 수 있으니 나는 하나님만 기쁘시게 해드리자” 라는 마음을 먹었었습니다.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죽기 살기로 전도했습니다.
그런 열심이 저를 신학교로 가게 만들었습니다. 거기서 만난 주님의 부르심(calling)을 받고 왔다는 동기들, 그리고 교수들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저 자신만이 이해하는 줄 알았고, 그 시간에도 죽어가는 영혼들을 생각하니 공부를 하는 시간 자체가 아깝다는 생각을 자주 했습니다.
동기들과 교수들은 저를 전도와 선교에 열정이 있는 사람으로 봐주기도 했고, 저 역시 올바른 길을 간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미국에 온 목적도, 미국에서도 세계의 모든 사람이 모인 뉴욕 쪽으로 온 것도 전부 전도를 위한 도구로 하나님이 나를 쓰시는 것” 이라고 착각했습니다.
그러던 중 섬기던 교회가 합병하면서 문제가 생기고 교회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을 때 원로목사님의 소개로 신학교가 있는 다른 주의 교회 목사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분도 선교에 대한 열정이 남달라서 맘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전공한 파트인 성가대 지휘자를 찾고 있었던 교회라 “하나님이 나를 제대로 쓰시나 보다” 라고 생각하여 그곳으로 이사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기뻤습니다. 쓰임을 받는 게 대단한 것이라고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점점 전도할 기회가 없어졌습니다. 선교를 하러 갈 기회도 저에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지역에서라도 팀을 이루어 전도를 하려고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목사님을 만나 상의도 했지만 추진할 수가 없었습니다. 뭔가 앞뒤가 맞지 않았습니다. 내가 있는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지 않아도 열심히 교회에 충성하며 단기 선교를 가야 하고, 또 그것을 지원해야 하는 것만 용인되는 시스템이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교회가 강조하는 공예배에서 소위 ‘살아있는 예배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담임목사님을 돕는 부교역자로서 제 길을 찾아가며 기발한 아이디어와 헌신으로 목사님을 기쁘게 하고 교인들을 기쁘게 했습니다. 그 가운데서 잘 하면 잘 할수록 사람들이 기뻐했기 때문에 두려운 하나님도 점점 더 잊혀갔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어느날, 회중은 물론이고 성가대 또한 자기가 무엇을 노래하는지 모르고 노래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삶에 치여서 자기가 무엇 때문에 성가대를 하는지도 모른 채 성가대석에 앉아있는 사람들, 교회당에 올 때 사람에게 보이려고 과시하는 옷차림을 한 사람들, 자기를 드러내고 싶어서 성가대에 서는 사람들, 더러는 복 받기 위해서 봉사하는 사람들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점점 사람들이 싫어져갔습니다.
발전이 없는 것은 둘째 치고 저도 예배와 찬양의 의미를 찾지 못해 지쳐만 갔습니다. 그런 것도 모른 채 노래만 잘 하고 소리만 잘 나오면 은혜 받았다고 칭찬하는 교인들이 많아 “이건 가짜다” 라는 생각이 점점 들기 시작했습니다. 예배에 대해 심각한 고민에 빠졌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게 아니라는 것,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않는다는 스데반의 메시지가 계속 생각이 났습니다.
기성교회에 대한 비판의식도 점점 강해졌습니다. 소위 개혁주의란 것에 젖어 들게 되었고, 인터넷에서 접한 신선한 설교에 심취되기 시작했습니다. 전도에 대해 부담감은 없어졌지만, 수준이 높아 보이는 설교를 들으면 들을수록 점점 더 하나님 아버지를 오해해가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예전보다 더 무서운 하나님으로 여기게 되었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도 없다’는 것, ‘인간이 내는 것은 다 죄밖에 없고, 교회를 가서도 그것을 깨닫고, 불 타 없어질 세상에서 소망 없음을 느끼며, 결국 죽어서 아버지 품에 갈 때에야 자유해진다’는 것을 그 설교를 통해 알게 되니,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소망도 사라져갔습니다.
그 가운데, 쇼를 방불케 하는 가식적인 예배 행위는 점점 더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사역 때문에 내팽개쳐진 아이들 문제로 교회를 갈 때마다 아내와 제가 부딪치고 날카로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여지껏 하나님을 섬긴다고 해오던 모든 것에 대한 의구심이 극에 다다랐고,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이것이 아니다” 라는 결론을 내리고 교회 전도사와 성가대 지휘자를 사임하고 나왔습니다.
방황을 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어떤 것일까?”를 묻고 또 묻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를 그만두니 시야도 넓어지고 생각도 넓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질문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이전 교회에 있을 때 만난 한국에서 오신 목사님이 일요일마다 가족끼리 예배를 하는 데에 가끔 합류를 하다가 몇 달 뒤 함께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정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예배 형식과 설교는 똑같았습니다. 꼭 그런 형식이 필요한지 설교가 필요한지에 대해 얘길 꺼내고 고민도 했지만 대안책이 없어 더 얘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한국에 계신 어떤 목사님에게 저의 상황과 방황하고 있는 고민들을 말씀 드리고 책도 추천해달라고 했더니 [이교에 물든 기독교]와 함께 프랭크 바이올라의 책들을 읽어보라고 했습니다.
인터넷 책방에 들어가서 후기를 보니, [이교에 물든 기독교]를 읽은 분들은 대개 두 부분으로 나뉘었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게 목적이니 형식이나 틀은 상관없다.’ 또는 ‘당대의 석학들이 만들어낸 전통이다. 그것도 하나님이 쓰시는거다’ 였고 대안책이 없다는 식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책을 읽은 후 여기에 무언가 답이 있다는 것을 느끼고 반드시 찾아야겠다는 맘이 들었습니다. 이젠 설교와 목회라는 것에도 거부감이 들었고,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게 절대 아니며, 예수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시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곧 제도와 형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형식과 틀을 볼 때마다 그리스도의 몸이 마비되어있고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신부의 숨통을 조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얼마가 지나서, 개척한 교회가 다른 교회와 합병하게 되어 겉으로는 사람들이 기대도 하고 뭔가 되는 것 같았지만 저는 오히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제 각각 얘기하는게 달라 저는 혼란스럽기만 했고, 내가 도대체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 건지, 어디로 가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어 너무나도 답답했습니다. “나는 정말 무식하구나. 다들 신앙생활 잘 하고 있는데 나만 이해 못하고 있구나” 그런 생각도 했습니다.
또 다시 아침마다 우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진리만 알게 해달라고, 하나님을 바로 알게 해달라는 기도만 했습니다. 개혁주의 말씀을 들을수록 하나님이 절대자같이 생각은 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는 더 멀게 느껴졌습니다. 지옥 가도 할 말 없다면서도 아무 두려움 없이 편하게 사는 것도 말이 안되고, 행위로 구원 얻는것도 아니니 개혁주의나 행위주의나, 이 교회나 저 교회나 다 말이 안되고, 저 혼자 미쳐버릴 것 같았습니다. 아내도 옆에서 지켜보며 많이 힘들어했습니다. 사는 것도, 이제는 죽는 것도 두렵고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언젠가, 책들을 통해 알게 된 유기적 교회 모임을 꼭 한번 경험해야 되겠고, 그게 유일한 길인 것 같다는 생각도 했지만 우선 하나님에 대해 너무나 알기가 힘들고, 알 수 있는 방법도 몰랐고, 모든 것이 다 싫고 우울하기만 했습니다. 한동안 그런 우울증과 싸우면서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싶었고 찾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중 프랭크 바이올라의 [영원에서 지상으로]를 읽고 제 눈을 의심했습니다. “이게 도대체 뭐지?” 했습니다. 한참을 멍… 했습니다. 하나님의 열정이 담긴, 말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칠흙같이 어두운 곳에서 하나님을 알고 싶고 찾고 싶은데 한줄기 빛을 발견하고는 견딜 수가없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그 책을 번역하신 분께 연락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분과 그분과 함께 하는 교회 지체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에베소서에서 바울이 얘기한 복음에 대해 듣게 되었습니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이 알게 하신,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계획하신 비밀의 경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즉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 무엇인지, 우리가 지금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며칠동안 지체들과 함께 묵으면서 듣게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다 정리되지는 않았지만 평소 너무 궁금했던 것들의 답을 찾기 시작했고,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 하나님의 집이요 가족으로서의 교회가 무엇인지가 복음을 들을수록 점점 선명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그런 교회의 지체로 사는 것이 저의 존재 이유임이 분명해졌습니다.
애매모호했던 것들이 하나 둘 풀리기 시작하면서 그동안 제가 하나님 아버지를 너무나 오해했다는 것,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찢어놓았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목적을 위해 십자가를 통해서 완벽하게 이루시고 우리에게 보여주셨는데, 저의 종교심과 어두운 눈과 탐심과 우상숭배가 하나님의 목적과 복음을 가리며 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에 대해, 예수님에 대해, 교회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하면서 제 인생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매일 매일이 놀라움의 연속이었습니다. 더 깊이, 더더 깊이, 끝도 없이 예수님과 복음을 알아가고 있습니다. 넘어지고 실수도 하지만 교회의 지체들이 있어서 머리 되신 예수님과 함께 하며 교제하고, 교회라는 하나님의 목적선에 올라 타 있는 것이 꿈만 같습니다.
세상이라는 바다에 있지만 실은 하늘에 속했고, 교회라는 목적선을 타고 지체들과 함께 멋진 항해를 하게 해주신 하나님께 너무나 감사합니다. 이 항해가 지금 이 땅에서부터 영원까지 이어짐을 알게 되니 더는 방황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죽어서 아버지 품에 갈 때에야 자유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목적을 이 땅에서 이루는 교회의 지체로 사는 것이 저의 존재 이유임을 알고 나니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함께 있는 이 지체들이 너무나 사랑스럽고 존귀합니다. 이제 그리스도와 교회와 영원히 함께 할 마음으로 침례를 받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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