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블로그에 글을 씁니다.
위의 사행시는 한국 순회 중에 고속도로의 화장실에서 본 것입니다.
이것을 보는 순간, 진정 이 글귀를 글자 그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이 세상과는 다른 하늘의 차원을 살아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뿐임을 직감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살아가신 삶의 방식이었고 또 그리스도의 사람들인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야 하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억지로, 징징거리고 투덜대며, 할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신나게
멋지게
져주며 사는 것
이것이 이 땅에 살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의 트레이드 마크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요 12:24-26)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요 18:35-36)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요 17:14)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눅 23:34-34)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행 7:59-60)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딤후 4:16)
하나님께서 “너 참 멋지다!” 라고 하시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 바로 이것이겠지요.
그런데 이렇게 사는 것이 참 바보같이 보이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귀하게 보실까요? (요 12:26)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에 들어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 12:24)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요 5:19)
이런 삶의 방식이 바로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를 그대로 따라 하신 삶의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삶은 오직 차원이 다른, 하나님의 필요와 목적을 추구하는 사람들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에만 관심이 있어 그리스도께서 머리 되시는 교회를 이루기 위한 것이 유일한 존재 이유인 그리스도인들만이 살 수 있는 멋진 방식입니다.
개인의 육적, 영적 필요에 집중하는 그리스도인들, 즉 자신의 구원이나 죽은 후의 저 어딘가에 있는 천국에 가기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 또 그런 개인들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교회들은 살 수 없는 삶의 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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