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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06

콩자루 교회냐, 메주 교회냐?

 

 콩과 메주

 

이번에 한국을 방문하던 중 여러 사람과 대화를 하면서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에 집중하는 현대 기독교의 심각성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복음이 잘 못 전파된 증거인데, 마침 프랭크 바이올라가 최근 자신의 블로그에 이것에 관해 쓴 글이 있어 그의 허락을 받아 여기에 인용합니다.

다음은 프랭크 바이올라의 블로그에서 퍼온 글입니다.

글의 제목은  [“개인의 구주”, 그리고 그리스도와 “개인적인 관계”를 갖는다는 사상의 기원] 입니다.

 

“오늘 나는 주님을 “개인의 구주”로 모신다는 것과 주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갖는다는 것에 관해 말하고자 하는데, 실은 내가 이 주제에 관해서 이미 다룬 바 있습니다.

아래에 그것을 인용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죄인의 기도가 궁극적으로 성서적인 물 침례(세례)의 역할을 대체했다. 오늘날 그것이 복음이라고 끈덕지게 졸라대지만, 이 기도는 최근에 고안된 작품일 뿐이다.

무디가 그것을 사용한 최초의 인물이다.

 

무디는 그와 함께 동역했던 복음 전도자들을 훈련할 때 이 기도의 “모델”을 사용했다. 그러나 그것의 사용이 1950년대에 와서 빌리 그레이엄의 전도 소책자인 Peace with God(하나님과의 평화)과 그 후 대학생 선교회(Campus Crusade for Christ)의 사영리(Four Spiritual Laws)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일반화되지 않았었다. 그것에 특별히 잘못된 것은 없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의 진심에서 우러나온 기도에 응답하실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회심 및 신앙의 시작을 위한 외적 수단으로서의 물 침례(세례)를 대체해서는 안 된다.

 

침례

 

개인의 구주라는 문구도 19세기 미국 부흥운동의 풍조에서 자라나 최근에 고안된 또 하나의 작품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1880년대 중반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찰스 풀러(Charles Fuller, 1887-1968)에의해 대중적인 용어로 자리 잡게 되었다. 풀러는 1937년부터 1968년까지 놀라울 정도로 인기리에 방송되었던 ‘구식의 부흥 시간’(Old Fashioned Revival Hour) 이라는 그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이 문구를 글자 그대로 수천 번도 넘게 사용했다.

그의 프로그램은 북미로부터 세계 곳곳을 향해 전파를 타고 펴져 나갔다. 그가 세상을 떠날 무렵에, 그 프로그램은 전 세계의 650개가 넘는 라디오 방송국을 통해 방송되고 있었다.

 

오늘날 개인의 구주라는 문구가 너무나 넓게 퍼져 있어, 그것이 성서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사용하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표현인가를 생각해 보라.

당신은 그런 표현으로 당신의 친구들을 소개한 적이있는가?

“내 ‘개인의친구’ 스미스를 소개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과 나는 개인의 구주보다 한참 더 위대한 무언가를 얻게 되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갖고 계신 그분과 아버지와의 친밀한 관계를 얻게 된 것이다!

신약성서의 가르침에 의하면,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대하시는 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과 나를 대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의 아들을 대하시듯 우리를 대하신다.

 

이 관계성은 개인적인 것 못지않게 공동체적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함께 이 관계성을 공유한다.

이런 점에서, 개인의 구주라는 문구는 아주 개인주의적인 기독교를 강화시킨다. 그러나 신약성서는 “오직 나와 예수님뿐” 이라는 기독교 신앙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오히려 기독교 신앙은 매우 집합적이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주님과 구주로 함께 아는 신자들이 모인 몸 안에서 살아가는 삶이다.

 

[위의 글은 프랭크 바이올라와 조지 바나가 공저한 이교에 물든 기독교의 250-252 쪽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이교에 물든 기독교

 

프랭크 바이올라가 아주 적절하게 문제점을 파악해서 정리해준 것 같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예수님과 똑같이 여기신다는 사실 위에 신앙이 정립되어야 하는데 교회와 상관 없는 개인 신앙이 오늘날 판치고 있습니다. 그런 기독교에 의하면 교회는 개인 신앙을 도와주는 단체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개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 지체로 존재할 때 가치가 있는 것이지 개인 신앙을 위해 교회를 다니는 기독교인 개인은 사실상 예수님과는 거리가 먼 사람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이런저런 신앙의 체험은 할 수 있어도 신약성경이 말하는 교회에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은 알 수도, 경험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은 오직 유기적인 예수님의 교회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차원의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개인 신앙을 위해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를 ‘콩자루 교회’ 라 할 수 있습니다. 콩자루에 넣은 콩들이 함께 있긴 하지만 전혀 하나가 아니듯 교회 모임에 함께 있긴 하지만 하나가 아닙니다.

콩자루를 쏟으면 딱딱한 콩들이 이리저리 아무데로나 굴러가듯 현대 기독교인들도 교회 모임을 나오면 제각각 흩어져서 개인적인 삶에만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모여 있으나 따로 있으나 딱딱한 콩처럼 기독교인들도 모여 있으나 홀로 있으나 자기 부인이 되지 않은 상태로 살아갑니다.

 

콩들을 큰 콩자루에 넣거나, 중간 사이즈 콩자루에 넣거나, 작은 콩자루에 넣거나 섞이지 않고 모여만 있듯이, 교회도 대형 교회이건, 중형 교회이건, 작은 교회이건 하나가 아닌 것은 마찬가지이고, 또 대 예배로 모이든지, 수요예배로 모이든지, 새벽기도나 철야예배로 모이든지, 소그룹으로 모이든지, 가정교회로 모이든지, 셀그룹으로 모이든지, 아니면 생활 공동체나 직장 공동체로 살든지… 하나가 아니고 다 거기서 거기인 것이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개인 구원, 개인의 영성, 개인의 성화, 개인 전도, 개인 사역, 개인이 가는 천국… 개인에게 집중된 기독교이기 때문입니다.

 

콩자루

 

딱딱한 콩들을 하나가 되게 하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콩들을 솥에 넣고 열을 가한 다음 절구에 넣고 으깨서 메주를 만드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자기중심적으로 살던 그리스도인 개인들도 유기적 교회라는 솥과 절구 안에서 하나님의 목적에 의한 복음을 바로 알아 자기가 부인될 때 비로소 메주처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복음으로 하나된 교회가 바로 하나님이 꿈꾸시는 교회입니다.

단, 이런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여야 합니다 (엡 2:20).

그리고 여기서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란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복음을 뜻합니다 (엡 3:5 – 6).

 

 메주 솥메주 만들기 메주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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