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1)
장례식 때 많이 사용되는 찬송 가사 중에 이런 게 있습니다.
저 요단강 건너편에 찬란하게 뵈는 집
예루살렘 새 집에서 주의 얼굴 뵈오리
빛난 하늘 그 집에서 주의 얼굴 뵈오리
한량없는 영광 중에 주의 얼굴 뵈오리
다음과 같은 가사로 된 노래도 장례식에 자주 사용됩니다.
날빛보다 더 밝은 천국 믿는 맘 가지고 가겠네
믿는 자 위하여 있을 곳 우리 주 예비해 두셨네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이 노래만 들으면 제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 어렸을 때 후렴을 바꾼 가사로 교회 다니는 애들을 놀리며 장난쳤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제가 개사한 게 아니고 어디서 주워듣고 불렀었지요.
며르치 며르치 된장국 속에서 만나리
며르치 며르치 된장국 속에서 만나리
또, 다음과 같은 노래 가사도 있습니다.
저 요단강 건너편에 화려하게 뵈는 집
나를 위해 예비하신 집일세
강가에는 생명나무 꽃이 만발하였네
주 얼굴 그곳에서 뵈오리
주의 얼굴 뵈오리 주의 얼굴 뵈오리
슬픔 하나도 없고 금빛 찬란한데서
구속하신 주의 얼굴 뵈오리
왕년에 흑인 영가의 일인자로 알려진 마리안 앤더슨의 “Deep River” 라는 노래의 가사 내용도 이렇습니다.
깊고 맑은 요단강 건너 내집
주님 계신 곳 그리운 고향에 가리로다
깊고 맑은 요단강 건너 내집
주님 계신 곳 그리운 고향에 가리로다
우리 함께 가세 우리 주님 계신 곳
언약하신 집 평화의 집
오 깊은 요단강 나 건너가 주님 만나리라
위의 노래들을 작사한 사람들은 다 신앙이 훌륭한 사람들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이 가사들의 내용을 살펴보면 일반적으로 잘못 알려진 애매한 성경 해석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즉, 가사 내용 전부 다 우리가 죽은 후 가게 될 저 어딘가에 천국이라는 집 또는 장소가 있고, 그 천국은 요단강을 건너서 들어가는 곳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천국”이 이 세상에서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 사는 사람들이 이 세상을 떠나면 이 세상 너머에 있는 차원으로 이사해서 역시 예수님과 함께 계속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면 그것은 성경과 합치합니다.
그러나 위의 노랫말은 이런 천국의 개념과는 거리가 먼 성경 해석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지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흔히 애굽은 죄악된 세상, 광야생활은 구원받고 난 후의 신앙생활, 그리고 가나안 복지는 죽은 후의 천국, 이런 식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천국을 가려면 “요단강”을 건너야 한다는 위의 노래 가사 같은 것이 나오게 됩니다.
또, 그래서 꿈에서나 기절했을 때, 또는 비몽사몽 간에 소위 천국을 갔다 왔다는 사람들의 간증에 이 “요단강”이 단골로 등장하곤 합니다.
구약성경이 예시하는 것들 중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진리가 왜곡된 경우입니다.
이런 왜곡은 다음과 같은 말씀만 제대로 이해해도 바로잡을 수 있는데 이것을 보는 눈이 가려진 게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가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어졌느니라
제칠일에 관하여는 어딘가에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또 다시 거기에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면 거기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나니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히브리서 4:1 – 11)
히브리서의 기자는 “안식”이 죽은 후의 천국이 아니라 이 땅에서 우리가 경험해야 할 어떤 차원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가나안 땅”이 예시하는 바 이 땅에서 우리가 경험하며 살아야 할 “안식”을 뜻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땅의 가나안 안식은 불가능하고 죽은 다음 요단강을 건너가야만 그것이 가능하다는 식의 논리로 세뇌를 받았기 때문에 성경을 볼 때 어디를 읽어도 이런 눈으로 보고 해석하는데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일을 놓치고 그르쳐버리는 크나큰 잘못을 범하고맙니다.
왜냐하면 이 가나안 안식은 하나님께서 창조 때, 아니 그 이전에 세우신 계획과 관련되어 있는 가장 중요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한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히 4:1 – 2)
히브리서 기자의 이 탄식은 아래 성경구절들 바로 다음에 등장합니다.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시게 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니
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아니냐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히 3:15 – 19)
여기서 “그들”은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을 가리키고, “우리”에는 1세기 때 히브리서를 수신한 교회는 물론이고 오늘 우리도 포함된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나 “우리”나 다 “복음”을 들었는데 그 복음이 유익하지 못하고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데 있습니다.
그 이유를 히브리서 기자가 “믿음”과 “순종”의 결핍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들과 우리가 들은 것이 어째서 “복음”이고, 그 복음이 유명무실해진 것이 어째서 믿음과 순종의 문제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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