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의사결정에 있어서의 문제 (4)

 

***이 글은 미국 시카고에서 발행하는 기독교 신문인  <크리스찬 저널>의 요청으로  2010년 가을부터  2013년 가을까지 격주로 기고한 글입니다.

 

예수님짜리 교회 63

의사결정에 있어서의 문제(4)

<유기적 교회의 방해요소 (44)>

 

교회가 합의에 이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지체들이 “피차 복종”의 자세가 있다면 그것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물론 이런 상호간의 복종에는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대가가 따르지만 말입니다. (단, 피차 복종하는 것은 바로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계급이 존재하는 제도적 교회의 토양에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상호간의 복종이 실천되려면 그것이 어디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에 대해 프랭크 바이올라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다시 그의 책 Reimagining Church(다시 그려보는 교회) 12 단원에서 인용합니다.

 

 

상호간의 복종은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뿌리를 두고 있다

 

우리의 논제인 상호간의 복종을 교회의 원형인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돌아가서 토론해보자. 상호간의 복종은 사랑에 기초하기 때문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성 바로 그 자체에 뿌리를 둔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공동체이다. 서로 함께 삶을 영원토록 공유하는 세 인격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아버지는 자신을 아들에게 쏟아 부으시고, 다시 아들은 자신을 제한 없이 아버지께 드린다. 그리고 성령은 거룩한 중재자로서 각 인격에서 다른 인격을 향해 그들의 사랑을 쏟아 붓는다.

이런 사랑의 축제 안에는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다. 지배하는 것도 없고, 권위주의도 없다. 관심사가 충돌하지도 않는다. 그 대신, 거기엔 상호 간의 사랑과 교제와 복종이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영구적으로 흐르는 상호간의 나눔은 사랑의 초석이다. 사실, 그것이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일 4:8) 라고 요한이 말할 수 있었던 바로 그 이유이다.

왜냐하면, 만일 하나님이 공동체가 아니라면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사랑하셨던 존재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의 행위에는 두 인격체 이상의 참여가 요구된다. 

 

교회는 왕의 공동체이다. 따라서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영원토록 흐르는 상호 사랑의 관계를 비추도록 부르심 받았다. 그러므로 교회의 교제 안에는 상호간의 사랑에 의해 지배되는 상호간의 복종이 있다.

거기엔 계급이 없고, 지배하는 것도 없고, 권위주의도 없다. 왜 그런가? 교회가 하나님의 생명 곧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존재하는 생명과 똑같은 생명에 의해 살도록 부르심 받았기 때문이다 (요 6:57; 17:20-26; 벧후 1:4).

 

교회라는 가정환경 속에는, 상호간의 복종이 하나 됨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사랑을 세우고, 안정을 공급하고, 성장을 촉진시킨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삶에 풍부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결코 친밀한 공동체 밖에서 살도록 의도된 것이 아니다. 왕의 공동체인 에클레시아는 자연 서식지이다.

 

이런 점에서, 상호간의 복종은 극단주의자들인 니골라당(성직주의)에 대한 소독약과 같다. 그것은 사람들 위의 권위가 아닌 사람들을 위한, 그리고 사람들 중의 권위를 강조한다. 그리고 소수의 권위가 아닌 모든 사람의 권한을 장려한다.

 

우리의 문화가 자기 의존과 개인주의와 독립을 조장하지만, 이런 것들은 유기적인 그리스도교의 자연환경과 공존할 수 없다.

하나님이 공동체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는 공동체를 위해 설계된 것이다. 우리의 새로운 본성이 그것을 고대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고립된 존재가 아니다. 우리가 그 형상을 본받아 창조된 삼위일체 하나님처럼 우리라는 종족도 공동체적 존재이다 (엡 4:24; 골 3:10). 우리는 똑같은 형상을 지닌 다른 사람들과의 의미 있는 관계성을 가지며 살아간다.

오늘날의 “커버링” 교리는 이 밝혀진 진리를 흐려버린다. 그러나 상호간의 복종 원리는 그것을 확실하게 복구시킨다.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본성은 인간의 모든 공동체를 위한 근원과 모델 둘 다로 쓰임 받는다. 그리고 상호간의 복종 원리가 그 참된 가치를 드러내는 곳이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관계성 안이다.

미로슬라브 볼프가 말했듯이, “교회가 균형 잡히고 분산된 힘의 분배와  자유롭게 인정된 교류에 의해 더욱 더 특징지어질수록, 삼위일체 공동체와 더욱 더 일치될 것이다.“

 

그러므로 상호간의 복종은 인간적인 개념이 아니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공동체적이고 상호적인 본성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본성을 드러내도록 에클레시아가 부르심 받았다.

이렇게 함으로써, 상호간의 복종은 우리로 하여금 유기적 교회생활의 바로 그 환경 속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게 해준다.

 

존 하워드 요더의 말을 빌리자면, 성서가 그리는 권위와 복종은 “로마보다 더 많은 권위를 교회에 부여하고, 오순절파보다 더 성령을 신뢰하고, 인본주의보다 개개인을 더 존중하고, 청교도들보다 도덕적 기준을 더 확실하게 하고, 주어진 상황에서 ‘새로운 윤리(the New Morality)’보다 더 열려 있다.”

 

요약하자면, 상호간의 복종은 절대화시키지 않고 영적 리더십을 높이 평가하는 문화를 창조한다. 그것은 지배하는 도구로 전락하는 일 없이 영적 권위에 반응한다.

왜냐하면, “멘토링 관계”와 “책임의 협력 관계”와 “영적 지시”가 상호간의 복종에 의해 지배될 때 그것들이 영적으로 건강하고 서로의 가치를 높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들은 오늘날의 관행인 계급적 “커버링”과는 닮은 점이 없다.

 

어쩌면 다음의 비유가 내가 이 장에서 말하고자 한 전부를 요약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는 상호간의 복종을 좋은 음악과 비교할 수 있다. 그것은 지혜로운 겸손과, 그리고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에 대한 깊은 신뢰와 연계하여 역할을 할 때, 신약성서 노래의 달콤한 하모니와 더불어 울리는 아름다운 멜로디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그것이 이 세상의 영을 특징짓는 계급제도로 대체될 때는 그 소리가 왜곡되고 만다. 더 나쁜 것은, 포스트모던 죄악인 싸구려 개인주의 및 독립심이 선호되고 상호간의 복종이 거부될 때, 그 음색과 음정은 전부 온데간데없고 그 뒤에 적막만이 흐르게 된다.

 

교회의 지체들이 이렇게 삼위일체 하나님 안의 교제에 그 뿌리를 둔 상호간의 복종이 몸에 밸 때 비로소 서로를 존중하며 합의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생명의 연장선상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는 이 삼위일체 하나님 안의 교제를 닮은 교제가 지체들 사이에서 벌어지지 않는다면 제 아무리 탁월한 의사결정 방법을 총동원할지라도 진정한 합의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제도나 조직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체, 곧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요 신부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글을 쓰면서 참고로 하고 또 자주 인용한 책인 프랭크 바이올라의 Reimagining Church 는 다시그려보는 교회 라는 제목으로 한국의 대장간 출판사에서 출간되었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을 위해 이 책의 목차를 소개합니다.

 

머리말

서론: 새로운 부류의 교회를 향하여

 1 부: 공동체와 모임

1. 다시 그려보는 유기체로서의 교회

2. 다시 그려보는 교회 모임

3. 다시 그려보는 주의 만찬

4. 다시 그려보는 모임 장소

5. 다시 그려보는 하나님의 가족

6. 다시 그려보는 교회의 일치

7. 교회의 관습 및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

 2 부: 리더십과 책임

8. 다시 그려보는 리더십

9. 다시 그려보는 돌봄 사역

10. 다시 그려보는 의사결정

11. 다시 그려보는 영적 커버링

12. 다시 그려보는 권위와 복종

13. 다시 그려보는 교단적 커버링

14. 다시 그려보는 사도적 전통

15. 우리는 여기서 어디로 가야 하는가?

부록: 리더십에 관한 이의 및 답변

관련서적

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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