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미국 시카고에서 발행하는 기독교 신문인 <크리스찬 저널>의 요청으로 2010년 가을부터 2013년 가을까지 격주로 기고한 글입니다.
예수님짜리 교회 60
의사결정에 있어서의 문제 (1)
<유기적 교회의 방해요소 (41)>
앞에서 오늘날 크게 오해되고 있는 교회 안에서의 리더십과 권위에 관해 신약성경이 말하는 올바른 개념을 대충 정리해보았는데, 이것을 바로 이해하면 의사결정에 있어서의 오류도 바로 잡을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적인 리더십과 권위에 대해 무지하므로 교회의 본질과는 동떨어진 의사결정이 판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인 교회에서 중요한 이슈를 놓고 결정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여느 모임처럼 의견이 분분한 것이야 당연한 것이지만,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놓고 분별해야 하므로 더욱 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확신이 달라서 대립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오죽하면 “회의 하다가 회의에 빠진다”는 말이 나오겠습니까? 사방에서 분쟁이 끊이지 않는 것만 봐도 교회 안에서의 의사결정이 얼마나 힘든지 알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 교포들이 가장 많이 사는 지역의 경찰서에서 근무하다가 정년퇴직한 한인 경찰관에 의하면, 그 일대의 비교적 큰 사이즈의 한인 교회들 중 경찰이 출동하지 않은 교회는 거의 없다고 합니다. 동료 미국 경찰관들이 한인 교회라고 하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교회 안에서는 서로 자기들이 하나님 편이라고 믿기 때문에 경찰이 출동하는 것을 세상 사람들이 봐도 꿈쩍도 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하지만 신약성경이 말하는 유기적 교회의 본질에 충실하면 분쟁과 대립이 아닌 바람직한 의사결정의 풍토가 정착될 수 있습니다.
교회의 본질에 어긋나는 의사결정
교회는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유기체이므로 예수님께서 인도하시는 가운데 유기적인 권위가 행사되어 돌아가야 하는데, 흔히 교회 안에서 무엇을 결정할 때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 아니면 당회나 집사회 같은 소수의 지도자 층이 다 해버리곤 합니다.
그리고 간혹 교인들이 의사결정에 참여한다고 해도 대부분 다수결에 의한 투표나 로버트의 의사규칙(Robert’s Rules of Order) 같은 세상의 방법이 동원됩니다. 이 세상의 제도적 사회에서 하는 것을 그대로 교회에 옮겨놓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의 왕정이나 독재정치나 민주주의와는 전혀 다른 그리스도께 속한 세계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통하는 방법을 빌려다가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특히 의사결정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이 세상의 방법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본질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프랭크 바이올라는 이것에 대해 Reimagining Church(다시 그려보는 교회)의 10단원에서 다음과 같이 피력했습니다.
초대교회의 장로들은 교회가 그들에게 속하지 않았음을 알았기 때문에 관철시켜야 할 의제가 그들에게는 없었다. 또 자신들의 “권위”를 내세우며 다른 사람들에게 맹목적인 복종을 강요하지도 않았다. (모든 장로가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초대교회의 장로들은 과두정치 체제(소수가 권력을 독점하는 통치 체제)나 독재정치 체제(한 사람에 의한 군주적 통치)로 운영하지 않았다. 다시 강조하지만, 그들은 단지 교회가 위기에 처했을 때 유기적으로, 자연스럽게 의지할 연장자들이었다.
게다가, 초대교회는 오늘날의 우리처럼 민주주의에 의해 운영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미국식 민주주의 제도가 성서적 신학에 뿌리를 둔다는 잘못된 생각을 한다. 그러나 신약성서 전체에 교회의 결정이 다수결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단 하나의 예도 나와 있지 않다.
물론 모든 그리스도인이 영적인 삶에서 평등하지만, 각 사람은 각기 다른 은사를 가진다 (롬 12:3-8). 교회는 단순한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런데, 요즈음엔 또 교회에서 직분자를 선출할 때 제비뽑기를 사용하는 경우가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도 늘 문제가 많고 후유증이 심해서 골치가 아프니까 누구에게도 책임을 돌리지 않는 방법, 즉 군소리가 나지 않도록 깔끔하게 처리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제비뽑기가 제격이라는 것입니다.
그 근거를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서 다 찾을 수 있으니 성경적이라고 주장할 수 있으므로 제비뽑기가 타당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 제비뽑기가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곳은 사도행전 1장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드러내시기 전, 예수님의 제자들이 가룟 유다를 대신하는 12 제자의 수를 채워넣을 때 제비뽑기를 사용한 예가 그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에 의해 교회가 본격적으로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한 오순절 이후에는 신약성경 그 어디에도 제비뽑기의 흔적이란 없습니다. 제비뽑기도 다수결처럼 유기적인 교회의 본질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기록되었다고 해서 교회에서 시행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초대교회의 의사결정 모델
그럼 초대교회에서는 어떻게 의사결정을 했을까요? 신약성경에 나오는 초대교회의 의사결정을 살펴보면 그것이 ‘합의’ 곧 만장일치에 의한 결정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에 관해서도 계속해서 프랭크 바이올라가 Reimagining Church(다시 그려보는 교회)의 10단원에서 다음과 같이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교회는 모든 지체가 어떤 특별한 결정을 지지하는데 있어 만장일치로 가결할 때 합의에 이르게 된다.
물론 교회가 결정에 동의하는 데는 열성의 정도 차이가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무거운 마음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합의라는 것은 모두가 반대 의사를 내려놓고 성실하게 그 결정을 지지할 수 있을 때 이르는 것이다.
교회가 합의에 의해 운영될 때 결정은 동의될 때까지 미루어진다. 이 과정에는 주어진 의제에 대해 주님의 마음을 알도록 모든 지체가 동등하게 참여하고 책임 지는 것이 요구된다.
덧붙여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마음은 개인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으로 발견되는 것이다. (고전 2:9-16).
교회가 합의에 이를 때 수군거림과 불평이 사라진다. 왜 그런가? 모든 지체가 결정과정에 공평하게 참여하기 때문이다.
교회에게 결정권이 있다. 그 결정은 성령의 인도 아래 교회에 의해, 그리고 교회를 위해 내려진다.
합의에 의한 의사 결정은 현대 실용주의에는 맞지 않는다. 실용주의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미국적인 태도이다: “일이 되기만 하면 그것은 좋은 것이다; 결과가 좋으면 그것은 참되다.”
현대 실용주의의 눈으로 보는 사람들은 합의를 이상주의적이고 비현실적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그것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알도록 확인시켜주는 유일한 안전장치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방법이 우리 시대에는 결코 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반박하겠지만, 이것은 절대로 옳지 않다. 나는 그것이 실천되는 여러 교회에 속했었다.
물론, 합의는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구원도 마찬가지이다 (마 19:26). 합의에 의한 의사결정을 실제적인 현실로 나타나게 하고, 나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생명에 풍성한 증거가 되게 하는 존재는 내재하는 성령이다…
제도권 교회의 의사결정 관행과 신약성서적 실체 사이의 단절은 실로 엄청나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왜 지금까지 헤매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지게끔 해야 한다.
많은 제도권 교회에서는 목사(때로는 ‘당회[또는 제직회]’)가 교회와는 상관없이 결정을 내린다. 장로들이 다스리는 어떤 가정집 교회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특정한 교회들에서는, 장로들이 교인들의 관심과 판단은 고려치 않고 결정한다. 지체들은 교회의 일에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더구나, 그들이 “줄서기”를 하지 않는다면 “다른 데로 가라”는 권유를 받는다.
다수결에 의해 결정을 하는 교회들에서는 “투표에서 진” 사람들이 대세의 판단에 의문을 갖게 된다. (때때로 그들은 절차가 공정했는지에 의문을 품는다.) 다수가 옳지 않은 예가 성서에 가득하다는 사실이 쉽게 간과된다.
많은 경우, 52 퍼센트가 승리를 자축할 때 48 퍼센트는 불만을 품고 다수결을 폄훼하려 한다.
초대교회의 의사결정 방법과 현대 교회의 그것에 천지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notice]예수님짜리 블로그를 이메일로 구독하기[/notice]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