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리더십과 권위에 관한 오해 (1)

 

***이 글은 미국 시카고에서 발행하는 기독교 신문인  <크리스찬 저널>의 요청으로  2010년 가을부터  2013년 가을까지 격주로 기고한 글입니다.

 

예수님짜리 교회 52

리더십과 권위에 관한 오해 (1)

<유기적 교회의 방해요소 (33)>

 

이제 앞에서 간간이 언급했던 리더십과 권위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이것처럼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리더십과 권위를 교회에 대입해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돌아가기 위해 그런 리더십과 권위가 필수라고 생각합니다.

크게 오해하는 것이고, 이것이 어쩌면 유기적 교회의 최대 방해요소일지도 모릅니다. 우선 일반적으로 가장 잘못된 사고방식부터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

 

종교개혁이니 전신자 제사장주의니 아무리 부르짖어도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 망령인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이 주님께서 원래 의도하셨던 교회가 되지 못하도록 계속 방해놓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중세의 그리스도인들과는 달리 성경을 얼마든지 읽고, 연구하고, 따져보고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직자가 하나님께서 평신도와 구별되게 따로 택하신 특별 전문 지도자 계급이라는 사고방식이 너무나도 확고하게 굳어진 나머지, 이것이 성경적인지 아닌지를 조금도 따져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제자훈련을 통해 또는 가정교회나 셀 교회를 통해 평신도를 깨우고 해방시킨다는 사람들조차도 성직자의 강력한 리더십과 권위에 의해 그런 운동을 주도하기 때문에 유기적 교회는 이룰 수 없습니다.

말만 성직자라고 하지 않지, 평신도 위에 다양한 명칭으로 존재하는 비성경적인 리더십과 권위가 사라지지 않는 한 신약성경적인 교회는 요원할 것입니다. 하워드 스나이더는 성직자와 평신도의 계급 구분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사역에 관한 신약성서적 교리는 성직자-평신도의 구분에 있지 않고, 상호보완적 두 기둥인 전신자 제사장주의와 성령의 은사에 달려 있다.

오늘날, 종교개혁 이후 4세기가 지났는데도, 개신교의 이 확신이 내포하고 있는 충분한 의미가 아직 실현되지 않고 있다. 성직자-평신도의 이분법은 종교개혁 이전의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넘겨받은 것이고, 구약 제사장제도로의 후퇴이다.

그것은 오늘날 교회가 효과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대표하는 하나님의 대리인이 되는데 있어 주된 장애물 중 하나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오로지 “거룩한 사람들” 곧 안수받은 목사들에게만 진정으로 리더십과 중요한 사역을 감당하는 자격과 책임이 있다는 그릇된 사상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신약성서에는 다양한 종류의 사역 사이에 기능적인 구분은 있지만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의 계급 구분은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는 역할과 기능의 구분만 존재하지, 계급 구분은 있을 수 없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현대 성직 제도의 폐해

 

명칭만 다르게 부를 뿐, 성직자와 평신도의 계급 구분이 엄연히 존재하는 현대 교회들이 성직자의 리더십과 권위를 토대로 해서 잘 돌아가고 많은 일을 행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의도하셨던 교회는 세워질 수 없다는데 그 문제의 핵심이 있습니다.

성직자의 리더십과 권위가 존재하는 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교회, 즉 하나님의 생명이 확장되어 생긴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몸으로서의 교회, 에베소서 4장이 뜻하는 바 모든 지체가 다 참여하여 하나를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되는 그런 교회는 세워질 수 없습니다.

 

아래는 프랭크 바이올라의 Reimagining Church(다시 그려보는 교회) 라는 책에서 인용한 글로써, 현대 성직 제도의 폐해에 대해 정확하게 지적한 내용입니다.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로, 신약성서의 편지들은 절대로 교회 지도자들을 “직분”과 여타 인간의 사회적인 조직의 관례에 의해 이해하지 않았다.

신약성서가 영적으로 돌보는 일에 특히 책임이 있는 사람들을 묘사할 때는 언제든지 그들이 하는 사역을 언급한다. 기능적인 언어들이 지배적이고, 동사들이 두드러지게 사용된다.

 

이와 관련해서, 현대 성직 제도는 성서적 기반이 없는 종교적 유물이다. 이 제도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여금 한 명의 지도자를 지나치게 의존케 함으로써 관객으로 전락하도록 했고, 또 교회를 그리스도인들이 전문가들의 공연을 관람하는 장소로 둔갑시켰다.

그리고 거룩한 모임을 평신도 구경꾼들의 지지를 받는 전문 설교가들의 무대로 바꾸어버렸다.

 

어쩌면 성직 제도의 가장 위압적인 특성은 그 제도가 섬기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영적 유아기에 방치하는 것일 것이다.

성직 제도는 공동체의 모임에서 영적 사역을 감당하는 그리스도인의 권리를 강탈하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의 사람들을 약화시키고 만다. 그리고 그들을 쇠약한 상태로, 또 불안정한 상태로 내버려둔다.

 

의심의 여지없이, 성직에 몸 담고 있는 많은 사람(대부분이 아니라면)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사랑하고 또 그들을 섬기기 원한다. 그들 중 많은 사람은 그들의 동료 형제들이 영적 책임의식을 갖는 것을 진정으로 보고 싶어한다. (많은 성직자가 자기 교인들이 더 큰 책임감 갖는 것을 보지 못하는 좌절감을 토로하지만, 그 문제의 원인을 자신들의 직업으로 돌리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하지만 전문 성직은 결국 신자 제사장주의를 무력화하고 또 누그러뜨리고 만다. 이 경우는 그 자리를 차지한 사람이 얼마나 제맘대로 하는지와는 관계없다.

그것은 이런 식으로 작동한다: 성직자가 맡고 있는 영적 작업량 때문에 대다수의 교인들은 수동적이고, 게으르고, 자기에게만 관심을 갖고(“나에게 먹여주세요”), 그리고 영적 발육장애에 처한다.

 

똑같이 심각한 것은 성직 제도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많은 사람을 빗나가게 한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 누구에게도 교회의 필요를 채우는 사역의 힘든 짐을 홀로 지라고 부르신 적이 결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직이 초래하는 이런 영적 비극과는 관계없이, 일반 대중은 계속해서 그것을 의존하고, 변호하고, 고집한다. 이런 이유에 의해, 소위 평신도들도 성직주의의 문제에 있어 성직자 못지 않게 문제에 책임이 있다.

 

사실, 많은 그리스도인이 누군가에게 봉급을 주고 사역과 목양의 책임을 지게 하는 편리함을 선호한다. 그들 생각엔, 자신의 희생을 요구하는 섬김과 돌봄의 부담을 스스로 안기보다는 하나님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종교 전문가를 고용하는 것이 더 낫다. 

 

옛 선지자의 말이 이런 사고방식을 향한 주님의 마음을 잘 포착하고 있다: “그들이 왕들을 세웠으나 내게서 난 것이 아니며 그들이 지도자들을 세웠으나 내가 모르는 바이며” (호 8:4).

요약하자면, 현대 성직 제도는 하나님의 생각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고, 살아 숨쉬는 유기체인 교회를 구약의 속박으로 몰아넣는다.

 

이런 냉정한 현실에 비추어서, 성직이 어떻게 해서 오늘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교회 리더십의 형태로 남게 되었지는지를 우리는 진지하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

그 대답은 종교개혁의 역사 속에 깊이 그 자리를 굳힌 것에 달려 있다. 그리고 그것은 계속해서 오늘날의 문화적 요청에 의해 보강되고 있다.

 

요약하자면, 성직은 종교적인 필요를 위해 하나의 직책으로 포장된, 행정과 심리학과 설교의 만능 합작품이나 다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서구에서 시행되고 있는 성직자의 사회적인 역할은 신약성서에 있는 그 어떤 것이나 사람과도 거의 연결점이 없다.

 

다시 강조하자면, 성직자가 상호간의 사역을 방해하기 위한 폭군일 필요는 없다. 그들 대부분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 직업으로 부르셨다고 진심으로 믿고 있는 유능하고 선의를 가진 그리스도인이다.

많은 사람이 자애로운 독재자이다. 어떤 사람들은 교인들의 삶을 구속하고 얼어붙게 하는, 마키아벨리식 권력에 목마른(역자 주: “군주론”을 쓴 마키아벨리의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이론) 영적 폭군이다.

 

중요한 것은, 성직자가 몸의 생활에 해가 되는 악한 형태의 권위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단지 한 단계 위/한 단계 아래의 계급적 리더십 모델만 거기 있어도 상호간의 사역을 억누르게 된다. 이것은 성직자의 기질이 아무리 권위적이지 않다 해도 사실이다.

 

단순한 성직자의 참석 자체가 교인들을 수동적이 되게 하고 영구적으로 의존하도록 조절해서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려서부터 목사들(그리고 사제들)이 종교 전문가라고 배웠다: 다른 모든 사람은 세속적인 일로 부름을 받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영적인” 것들을 다룰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다. 성직자들이 종교 전문가로 여겨지기 때문에, 교회의 다른 사람들은 스스로를 수동적으로 받기만 하는 존재로 여긴다.

 

크리스천 스미스가 말했듯이, “문제는 우리의 신학이 성직자의 목적에 관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과 관계없이, 성직의 실제적인 영향이 그리스도의 몸을 불구로 만든다는데 있다. 이것은 성직자가 그렇게 의도하기 때문이 아니라(그들의 의도는 보통 그 반대이다) 성직의 객관성이 필연적으로 평신도들을 받기만 하는 수동적인 사람으로 바꾸어버리기 때문에 벌어지는 것이다.”

 

일반적인 신자는 어쩌면 자신이 갖고 있는 리더십의 개념이 수세기에 걸쳐 내려온(약 1700년 가량) 교회사에 의해 형성되었음을 알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성직자 개념이 우리의 생각 속에 너무나도 깊숙이 박힌 나머지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그 어떤 시도라도 종종 극심한 반대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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