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십일조의 문제 (5)

 

***이 글은 미국 시카고에서 발행하는 기독교 신문인  <크리스찬 저널>의 요청으로  2010년 가을부터  2013년 가을까지 격주로 기고한 글입니다.

 

예수님짜리 교회 39

십일조의 문제 (5)

<유기적 교회의 방해요소 (20)>

 

말라기 3장에 등장하는 십일조까지 살펴보았는데, 이제 십일조라는 말이 신약성경에 유일하게 등장하는 마태복음 23:23을 다룰 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신 말씀에 이 단어가 등장합니다.

 

 

신약성경에 있다고 신약시대?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마 23:23)

 

여기서 정의와 긍휼과 믿음도 버리지 말고 십일조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근거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목회자들이 교회를 운영하는데 막대한 돈이 필요하므로 십일조를 강조는 해야겠는데, 구약에 나오는 십일조는 이스라엘에 주신 율법이라서 강력히 주장하기엔 뭔가 좀 석연치 않을 때, 마침 주님께서 구약이 아닌 신약성경에서 십일조를 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으니 위의 구절이야말로 갖다가 쓰기에 안성맞춤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나 베드로나 요한이 말했더라도 권위가 있었을 텐데 하물며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의 권위에 누가 감히 도전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생각이 조금만 있어도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던 때와 대상을 살펴보고 이것이 교회와는 상관 없는 말씀이라는 것쯤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위의 말씀은 아직도 구약시대를 살고 있던 이스라엘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한 말씀이지 오늘날의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도를 알고 오늘 우리에게 적용해야겠지만, 무조건 우리에게 하신 말씀으로 읽으면 곤란합니다. 신약성경에 있다고 해서 다 신약시대인줄로 오인하면 안되고, 분별을 해야 합니다.

 

 

교회와 십일조

 

앞에서 누누히 강조했듯이, 신약시대의 시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 승천, 성령의 오심에 의해 교회가 탄생한 시점부터입니다.

그러므로 원칙적으로 십자가 이전은 전부 다 구약시대에 속합니다. 아래의 말씀을 다시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골 2:14-15)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엡 2:14-16)

 

십자가에서 율법이 제하여지고, 폐하여져서 완성된 다음, “한 새 사람”인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요 신부인 교회가 등장했습니다. 이 새 사람인 교회는 이전의 율법에 의해 제재를 받지 않고 예수님과 하나를 이루어 살아갑니다.

따라서 이 새 사람에 속한 지체들은 더는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사랑의 교제를 위해 자발적으로 헌신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십일조에 있어서도, 율법으로서의 십일조는 사라지고 주님의 마음을 따라 십일조의 정신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 이후에 등장하는 신약성경의 내용 그 어디에도 십일조라는 단어조차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인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지체들에게 십일조를 하라는 것은 모독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부모님의 마음과 하나인 효자나 효녀에게 부모님께 용돈 얼마를 꼭 드려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들에게 이런 강요를 하는 것은 모독입니다. 사랑하는 부모님에게 필요가 있으면 그들은 언제든지 자발적으로 해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약성경적인 유기적 교회에 속한 지체라면 강요하지 않아도 예수님의 몸인 교회의 필요에 자발적으로 임하게 되어 있습니다. 십일조가 아니라, 필요에 따라 십오조, 십구조, 십십조도 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과 주님의 몸에 대한 사랑때문에 하는 것이지 명령에 의해서나 복을 받으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헌금 목적 하나

 

문제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오늘날의 교회들 중 신약성경이 말하는 유기적 교회가 아닌 제도적 조직으로 전락한 교회들이 많기 때문에 조직을 운영하기 위해 참 교회로서는 필요치 않은 것에 막대한 돈을 들이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십일조와 헌금을 끊임 없이 강조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 나오는 초기 교회들의 필요는 오늘날의 교회들과는 달리 단 두 가지였습니다. 그 중 하나는 구제였습니다. 아래의 성경구절들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행 4:33-37)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행 11:27-30)

 

위의 내용은 예루살렘교회 안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헌금한 것과 흉년이 들어 예루살렘교회가 곤경에 처했을 때 안디옥교회가 도움을 준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 (롬 15:26-27)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내가 이를 때에 너희가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고전 16:1-3)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 (고후 8:1-5)

 

위의 구절들은 사도 바울이 이방인 교회들을 독려해서 가난한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을 구제한 것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렇게 초기 교회들이 헌금한 목적은 구제를 위한 것이 하나였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헌금 목적 또 하나

 

그리고 다른 목적 하나는 아래의 구절들이 암시해줍니다.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사귐으로 얼마간 기쁨을 가진 후에 너희가 그리로 보내주기를 바람이라.” (롬 15:22-24)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빌 4:10-16)

 

이 구절들을 보면 초대 교회 성도들이 교회를 세우고 돌보기 위해 돌아다니는 사도들, 즉 바울과 같은 순회사역자들의 경비를 지원하기 위해 또한 헌금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오늘날엔 시대가 바뀌었으므로 구제와 순회사역자들의 경비 지원 외에 교회 안에 다른 필요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유기적인 교회엔 오늘날의 교회들에게 들어가는 것과 같은 막대한 돈이 필요치 않다는 사실과 정당한 필요를 위한 헌금도 십일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십일조로 이런 필요를 충당한 것이 아니라 필요한 만큼 자발적으로 헌금을 했듯이, 오늘날 우리도 그렇게 하는 것이 복음의 정신과 일치할 것입니다.

한마디로, 십일조는 신약교회와는 무관하고, 십일조를 강조하는 것은 신약성경적인 유기적 교회와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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