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십일조의 문제 (3)

 

***이 글은 미국 시카고에서 발행하는 기독교 신문인  <크리스찬 저널>의 요청으로  2010년 가을부터  2013년 가을까지 격주로 기고한 글입니다.

 

예수님짜리 교회 37

십일조의 문제 (3)

<유기적 교회의 방해요소 (18)>

 

모세가 받은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십일조가 이스라엘의 세금제도가 되기 전에 과연 십일조가 있었는지, 그리고 있었다면 어떤 의미였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먼저 아브라함의 경우를 살펴보았습니다.

성경에서 그 다음에 등장하는 “십분의 일”에 관한 언급은 야곱에 의해서입니다.

 

 

야곱의 십일조?

 

야곱이 가나안 땅 브엘세바의 집을 떠나 머나 먼 하란으로 가던 중 길에서 잠을 자다가 꿈을 꾸고 깨어난 후 하나님께 서원하는 장면에서 “십분의 일”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창 28:20-22)

 

위의 성경 본문은 종종 ‘야곱의 십일조 서원’ 이라는 제목이 붙어 십일조를 강조하는 설교자들에 의해 애용되곤 합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와 더불어 율법의 규례가 되기 이전에 이미 존재했던 십일조의 예로 사용하기에 참 좋은 자료를 제공하는 본문입니다.

그러나 이게 과연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십일조를 해야 되는 근거가 될까요?

또 야곱의 서원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 우리에게 좋은 본보기가 될까요?

 

 

야곱이 십일조 서원을 하게 된 배경

 

우선 야곱이 서원한 내용을 살펴보기 전에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좀 아는 것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래야만 그 십일조 서원의 내용을 제대로 분석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래의 야곱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가 아주 잘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잠깐 설명을 하겠습니다.

 

야곱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이 낳은 쌍둥이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나서 어머니인 리브가의 편애를 받고 자란 ‘마마보이’였는데, 어려서부터 욕심과 야심이 많았고, 수단과 술수를 잘 부렸던 사람입니다.

늘 몇분 몇초 늦게 태어나서 장자가 되지 못한 것을 억울해 하며 살던 그에게 어느날 절호의 기회가 왔습니다. 어머니가 긴급 입수한 따끈따끈한 정보를 가지고 와서 형 에서에게 갈 축복을 쟁취할 청사진을 소개했을 때 어머니와 의기투합하여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는 아버지 이삭 앞에서 형 에서로 가장하는 연극을 잘 소화해 낸 야곱은 하나님까지 팔면서 거짓말로 형에게 갈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인내하며 겸손하게 기다리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잘 알아서 복을 주셨을 텐데, 성급하게 수단을 부려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의 대표쯤 되는 사람이 바로 야곱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야곱은 결국 형 에서에게 죽임 당할 고비를 간신히 넘기고 머나 먼 하란 땅으로 도망가서 20년 동안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격인 외삼촌 라반에 의해 이리 속고 저리 속으며 뼈 빠지게 고생을 해야만 했습니다.

 

이런 야곱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외삼촌 집을 향해 가던 야곱에게 꿈에 나타나셔서 아무런 꾸지람도 하시지 않고,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약속하셨던 똑같은 약속을 그에게 하셨습니다.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창 28:13-15)

 

잠에서 깨어난 야곱은 이런 식으로 깨달았습니다: “아, 하나님은 저 두고 온 아버지 집에만 계시는 줄 알았는데 여기서도 나와 함께 하시는 나의 하나님이시구나!” 야곱이 그동안 하나님은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인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제 자신의 하나님도 되심을 깨달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들에게 언젠가는 꼭 벌어져야 할 경험일 것입니다. 즉, 기독교 종교인으로서의 삶에 종지부를 찍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야곱에게 그런 역사가 벌어졌습니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바로 소위 ‘야곱의 십일조 서원’ 이라는 그것이 문제라는 말입니다. 아주 자기중심적인 속물근성의 발로입니다.

오늘날도 기독교인들 중에 이런 야곱과 동류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십일조를 바치는 동기가 야곱과 대동소이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야곱의 십일조 서원이 어째서 문제가 됩니까? 하나님께 다음과 같이 조건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이 말을 뒤집어 보면, 자기가 내건 조건을 들어주시지 않으면 여호와는 야곱의 하나님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조건 대로 되지 않으면 십분의 일을 드리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가 내건 조건은 대략 세 가지입니다.

첫째, 아직도 하란에 도착하려면 고통스런 사막을 거쳐 한참을 가야 하고 또 강도들이 도처에 우글거리는데, 하나님이 자신의 목숨을 지켜주셔야 한다는 것;

둘째, 앞으로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부족하면 안된다는 것, 즉 물질 축복을 해주셔야 한다는 것;

셋째, 하란에서 다시 아버지 집(부모가 살고 있는 브엘세바, 실은 마마보이였으므로 어머니를 더 보고싶어 했을 것임)으로 아무 문제 없이 돌아갈 수 있게 해주셔야 한다는 것. 즉, 자기를 죽이려 하는 형 에서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주셔야만 다시 집에 편히 돌아갈 수 있다는 것.

이 세 가지 조건을 들어주시면 여호와를 자신의 하나님으로 삼고, 하나님이 주신 물질에서 십분의 일을 꼭 바치겠다는 것이 야곱의 서원입니다.

 

이 야곱의 서원을 현대판으로 바꿔보면:

첫째, 나의 목숨을 지켜주시고(안전, 건강, 병고침 등);

둘째, 나에게 만사형통하도록 해주시고(물질축복, 기도응답 등);

셋째 나에게 아버지 집을 보장하신다면(에서같이 무서운 존재인 마귀가 없는 천국에 들어가게 하신다면), 이걸 전제로 십일조를 바치겠나이다.

이런 식이 될 것입니다. 그야말로 소위 ‘삼박자 구원’이 따로 없겠지요. 이런 수준이 야곱의 십일조 서원입니다.

 

야곱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위력을 알 수 없었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쳐도, 그런 유치하기 짝이 없는 조건부로 시작된 야곱의 십일조가 오늘날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가는 예수님짜리 교회의 성도들에게 어울린다고 생각됩니까?

본보기는커녕 오늘날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기 유익을 챙기려는 속물 기독교인의 추한 단면을 예시한 것으로 보는 편이 타당할 것입니다.

 

 

십일조 도둑놈들아?

 

율법으로서의 십일조가 주어지기 전에 살았던 아브라함과 야곱의 경우를 살펴봤는데, 둘 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십일조를 해야 하는 근거가 될 수 없음이 명확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다시 말하거니와, 이 두 경우를 보고 십일조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면, 그건 그 사람의 자유입니다. 다만 이것들을 근거로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강조하거나 부담을 갖는다면, 그것이 바로 ‘성경 본문을 증빙자료로 사용하기(proof texting)’의 전형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라기 3장에서 십일조 하지 않은 것을 하나님께서 “도둑질”이라고 무섭게 책망하신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말라기 3:8-10)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십일조를 하지 않는 교인들은 아마 두려움이 생기든지, 변명거리를 찾든지, 아니면 반감이 생길 것입니다.

반면에, 십일조를 꼬박꼬박 바치는 교인들은 아마 우선 안심이 되고, 그 다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한 교인들을 향해 은근히 우월감이 생기고, 또 하늘 문이 열려서 복이 넝쿨째 굴러들어오기를 고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엉터리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지만, 특히 이 말라기 3장의 십일조에 관한 말씀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 본문은 복음을 바로 알고, 배경과 문맥을 살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물론 무식하면 문자에 붙들려서 용감하게 “십일조 도둑놈들아!” 라며 강대상을 손으로 치고 열변을 토하게 되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 십일조 도둑놈들(?)이 과연 누구를 지칭한 것인지가 이 본문을 바로 해석하는 열쇠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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