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십일조의 문제 (2)

 

***이 글은 미국 시카고에서 발행하는 기독교 신문인  <크리스찬 저널>의 요청으로  2010년 가을부터  2013년 가을까지 격주로 기고한 글입니다.

 

예수님짜리 교회 36

십일조의 문제 (2)

<유기적 교회의 방해요소 (17)>

 

이제 구약의 율법이었던 십일조, 즉 이스라엘의 세금제도였던 십일조를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교인들에게 의무로 지우는 것이 타당한지 아닌지를 성경적, 역사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전에 독자들 중, 특히 목회자 중에 나름대로 성경을 사용해서 반론을 제기할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므로, 이스라엘의 세금제도가 되기 전에 십일조가 있었는지, 그리고 있었다면 어떤 의미였는지를 먼저 알아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브라함의 십일조?

 

십일조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따집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에 분명히 십일조가 여호와의 것이라고 했으니 (레 27:30) 율법시대의 이스라엘은 그렇다 치고, 그 한참 전에 살았던 조상 아브라함은 율법시대가 아닌 시대에 제사장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는데 (창 14:17-20) 이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런 반론에 대해서는 프랭크 바이올라가 그의 책 [이교에 물든 기독교] 233페이지에서 다음과 같이 명쾌한 논리로 답해주었습니다:

 

“첫째, 아브라함의 십일조는 철저하게 자발적이었다. 강요받은 적이 없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십일조를 명하신 것처럼 그에게 명하시지 않았다.

 

둘째, 아브라함은 그가 싸웠던 특정한 전투에서 얻은 노획물 중에서 십일조를 했다. 그는 자기 정기적인 소득이나 재산에서 십일조를 하지 않았다.

아브라함의 십일조는 당신이 복권에 당첨되었다든지, 잭팟을 터뜨렸다든지, 아니면 직장에서 보너스를 받아서 십일조 하는 것과 비슷하다 하겠다.

 

셋째,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이 아브라함이 지상에서 175년을 살면서 십일조를 바쳤던 유일한 기록이다. 우리는 그가 또다시 그런 십일조를 드렸다는 증거를 찾아볼 수 없다.

결과적으로 당신이 만약 아브라함의 경우에 ‘본문을 증빙자료로 사용하기(proof text)’를 적용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당신이 십일조를 해야 할 의무는 딱 한 번뿐이다!”

 

하나님께서 싸우러 나가는 아브라함에게 “그돌라오멜 연합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게 해줄테니 탈취물 중에서 십일조를 바치라” 라고 명령하신 적이 없습니다. 또는 십일조를 바치겠다고 맹세하면 전투에 이기게 해주겠다는 식의 거래도 제의하신 적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순전히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바친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십일조를 바쳐야 한다는 명령이라고 여기는 것이 얼마나 황당한 발상입니까? 하나님을 아브라함에게 십일조나 요구하시는 그런 시시한 명령을 내리시는 분으로, 또는 아브라함을 십일조해놓고 하나님께 순종했다고 생각하는 속물로 여기면 곤란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십일조나 명령하시는 분으로 알아서야 되겠습니까? 또 복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 상속자 된 교회의 지체들이 십일조했다고 순종 운운하는 것이 얼마나 유치하고 한심한 일입니까?

하나님은 하나밖에 없는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엄청난 명령을 내리시는 분이고, 아브라함은 그런 명령을 순종할 정도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누리던 사람입니다.

 

이런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위해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것이고, 따라서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복음을 받아 들인 우리는 십일조처럼 시시한 수준이 아닌 우리의 삶 전체를 주님께 드리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자기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던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쳤듯이 말입니다.

 

만일 누가 창세기를 읽다가 아브라함의 경우를 보고 나서 하나님께 자발적으로 십일조를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처럼 십분의 일을 드리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불순종하는 것이라거나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이라고 여긴다면 그건 성경을 제멋대로 읽고 있는 증거입니다.

이런 식으로 성경을 읽고, 가르치고, 강조하기 때문에 순진한 교인들이 두려워하고, 겁을 먹고, 부담을 갖고, 세뇌 당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기독교 종교입니다. 유기적인 교회생활의 방해꾼입니다.

 

 

아브라함의 결단

 

주제에서 약간 벗어나긴 하지만, 말이 나온 김에 하나님께 대한 아브라함의 자발적인 결단에 대해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저의 생각엔, 우리가 창세기를 읽을 때 아브라함으로부터 본을 받아야 할 것 중에서 이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고 봅니다. 십일조가 아니라 이것이 핵심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하나님께 합당한 사람으로 키우시고자 훈련하신 내용인데,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 이루시려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기꺼이 그 훈련을 받으며 자발적으로 임했습니다.

물론 실수도 여러번 했지만 궁극적으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에 걸맞게 하나님의 의도를 올바로 파악하고 그것을 끝까지 고수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는 것인데 (창 12:2), 그것은 오직 ‘가나안 땅에서’ (창 12:7; 13:15; 창 15:7), 그리고 ‘이삭을 통해서’ (창 17:19)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과정에서 아브라함은 많은 훈련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과정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제맘대로 해서 실수를 범한 적도 여러번 있었습니다.

75년 동안이나 살아왔던 메소포타미아를 떠나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가나안 땅으로 가는 과감한 결단을 하고 실행에 옮겼지만, 그 땅에 기근이 닥치자 믿음이 연약해져서 애굽으로 갔다가 큰 코 다칠 뻔하고는 다시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창 12:10-13:1).

또 하나님께서 주실 아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엉뚱하게 아내의 말을 듣고 여종과 동침해서 이스마엘을 낳는 잘못을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창 16:1-16).

 

하지만 아브라함은 이런 잘못들을 극복하고 일어나서 하나님의 뜻을 고집하는 사람으로 변모해갔습니다.

조카인 롯을 떠나보내면서까지, 물이 넉넉한 좋은 땅을 포기하면서까지 가나안 땅을 고수하고 (창 13:1-12), ‘이삭을 통해서’를 고수하기 위해 장남 이스마엘을 내쫓는 결단까지 내립니다 (창 21:8-14).

또 이삭의 아내를 구할 사명을 받고 메소포타미아로 떠나보내는 종에게 절대로 이삭을 데리고 가지 못하도록 반복해서 강조하기도 합니다 (창 24:5-8). 혹시나 이삭이 그곳에 갔다가 거기서 발목 잡히게 되면 ‘가나안 땅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하나님의 목적이 다 수포로 돌아갈 것을 미리 차단하는 아브라함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25장에서는 아내가 죽고 난 후에 취한 후처의 소생들을 자기의 생전에 가나안 땅으로부터, 또 이삭으로부터 멀리 멀리 떠나도록 조치하는 아브라함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는데 방해요소들을 자기가 살아 있을 때 일찌감치 제거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시켜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과 의도를 읽고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기꺼이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예수님 제자로서의 결단

 

이런 과정에서 아브라함이 받은 훈련은 사람, 목적, 소유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흔히 3P라고 하는 것입니다: purpose, people, possession.

이것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거쳐야 할 훈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인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이런 훈련을 받으며 자발적인 결단을 해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깊이 새겨야 합니다.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사람]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목적]…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소유]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 없어 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 (눅 24:25-35)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제자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고 그분의 몸인 교회의 지체가 된 사람들은 이 세상의 모든 것(사람, 목적, 소유)을 초월해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사는 것이 기본입니다. 정말 위로부터 태어난 사람이라면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 생명의 유전자가 그렇게 하도록 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런 생명의 유전자가 있는지 없는지를 스스로 솔직하게 살펴봐야 합니다. 혹시 내가 사랑하는 사람(자신을 포함해서)과 내가 꿈꾸는 목적과 나의 소유를 위해 하나님을 활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말이 하나님 순종이지, 실은 복 받고 싶어서, 나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은 아닙니까? 이것은 충성이 아니라 영적 거래입니다. 십일조가 혹시 그런 거래의 역할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영광스런 하나님의 목적, 즉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경륜을 이루기 위해 사는 우리가 구약시대 수준의 저차원적인 십일조 같은 것을 하면서 대단한 신앙으로 착각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청지기입니다. 즉,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맡아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사용할 뿐입니다.

이것을 이론이 아닌 진짜 삶 속에서 그대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십일조 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모욕입니다.

 

그래서 1세기의 교회 성도들에게 쓴 편지 그 어디에도 십일조라는 말이 등장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니, 그런 흔적조차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살아가는 유기적인 교회에서는 그것이 너무나도 수준 낮은 말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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