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미국 시카고에서 발행하는 기독교 신문인 <크리스찬 저널>의 요청으로 2010년 가을부터 2013년 가을까지 격주로 기고한 글입니다.
예수님짜리 교회 11
예수님께서 예비하신 거처
종종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생활을 거쳐 가나안 땅에 들어가 안식한 것의 상징하는 바가 이 세상을 벗어나 천국에서 안식하는 것이라고 잘못 이해해서 적용합니다.
그래서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또는 “저 요단강 건너편에 찬란하게 뵈는 집” 같은 가사를 담은 노래가 생겨나 장례식에서 불려지곤 합니다.
가나안 땅이 상징하는 것
하지만 이런 식의 적용 때문에 가나안 땅이 가리키는 바 그리스도 안에서 경험되는 풍성하고 충만한 삶의 의미가 희석되어버립니다.
사도 바울이 강조하는 다음과 같은 교회생활 말입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에베소서 1:23)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에베소서 3:16-21)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게 되는 교회생활의 풍성함의 예표입니다.
무슨 근거로 이런 주장을 펴서 전통적인 해석에 비판을 가하냐고 한다면 히브리서 기자가 다음과 같이 답변해 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러면 거기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나니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히브리서 4:1-11)
가셨다가 다시 오시는 예수님
이와 같이, 가나안 땅은 죽은 후의 천국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누리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된 안식, 곧 풍성한 교회생활을 가리킵니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교회생활을 가리키는 예수님의 말씀을 잘못 해석한 것 중의 하나가 앞에서 지적했듯이 요한복음 14:1-4을 죽은 후에 갈 천국이라는 장소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얘기로 보는 견해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라고 하시니까 저 멀리에 있는 어떤 장소에 큰 집이 있고 그 안에 수많은 방이 있는 줄 압니다.
또 “내가… 가노니… 내가 다시 와서…” 라고 하시니까 무턱대고 ‘재림’을 뜻한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난 후 당연히 천국에 갈 것이고 또 예수님께서 언젠가는 꼭 재림하시겠지만, 여기서는 전혀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고 계십니까? 14장 전체의 문맥을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는데, 우선 지금 예수님은 “자기 사람들(제자들)”만 모아놓고 말씀하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요 13:1).
따라서 이것은 그들의 눈 앞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들을 떠나셨다가 사흘 만에 그들에게로 다시 오실 것, 즉 부활하셔서 그들 앞에 나타나실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재림이 아닙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뭔가 해주시겠다고 하신 것을 볼 때 이것은 또 이 세상을 떠난 후의 천국에 관한 얘기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아버지 집의 “거할 곳”(“나 있는 곳”)은 어디인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시기를 부활하신 후에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나 있는 곳”은 다름 아닌 바로 앞에서 말씀하신 ‘아버지 집의 거할 곳’입니다. “나 있는 곳”, “거할 곳” 이라고 하니까 금방 어떤 장소를 떠올리기가 쉽겠지만, 이것은 공간의 개념이 아니고 관계성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14:3의 “내게로”와 14:6의 “아버지께로” 라는 표현이 이를 입증해주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생명의 교제를 이렇게 표현하신 것입니다. 아래의 말씀이 이것을 더욱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줍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요한복음 14:16-20)
성령(“진리의 영”, “또 다른 보혜사”)이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이후에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 제자들(교회)을 하나가 되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계획하신 그 분의 목적이 이루어지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재림의 얘기가 아니고 성령의 역사로 펼쳐질, 이 땅에서부터 시작되어 영원토록 지속될 ‘교회생활’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너희와 함께”, 그리고 “너희 속에” 라는 표현은 성령이 어떤 개인의 영혼에 들어오신다는 뜻이 아니고 교회(“너희” – 제자들의 무리) 안에 사시겠다는 뜻입니다.
14:2의 “거할 곳”과 14:23의 “거처”가 둘 다 헬라어로 ‘모네(mone)’라는 것을 알면 예수님의 의도를 금방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우리”)께서 예수님을 사랑해서 그분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로 가셔서 함께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아버지 집의 거할 곳’ 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이 계신 어딘가에 있는 장소로 가는 것이 아니고, 거꾸로 아버지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로 오셔서 함께 생명의 교제를 나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나가는 교회생활인데, 개역성경은 ‘모네’를 각각 한글(“거할 곳”)과 한자어(“거처”)로 번역함으로써 아주 중요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도록 헷갈리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면 이 글의 앞부분에서 계속 강조했던 온전한 복음이 더 선명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려고 하시는지, 하나님의 필요가 무엇인지 더욱 분명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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